미국 유학시절,계속되는 시험과 리포트에 빡빡한 수업 일정으로 지쳐 있던 차에 마침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왔다. 하루 정도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는데 이상하게 선거일이 점점 다가오는 데도 쉰다는 얘기가 별로 없었다. 답답해진 나머지 미국 친구에게 대통령 선거일이 휴일이 아니냐고 물었다가 이내 머쓱해졌다. 정상 근무를 하면서 출근 전,퇴근 후,아니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투표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휴일로 지정하면 놀러 가느라고 투표율이 더 떨어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또한 투표용지에는 대통령 투표를 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선출직 등 20여 자리에 대한 투표도 함께 하기 때문에 투표에 10여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여러 번 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었다. 대통령,국회의원,자치단체장에 대해 각각 선거일을 정하고 이날들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사실 투표를 하기 위해 나라 전체가 모두 쉰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혹시 쉬더라도 투표일을 줄일 수 있도록 임기를 맞추는 정도의 설계는 시행 초기부터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는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이 중요한 날들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일년간 우리는 총선 올인 전략이 무엇인가를 똑똑하게 지켜보았다. 국무위원과 청와대 비서진들을 임명해 놓고 임기 끝까지 일을 시킬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결국 총선 징발령을 내려 세간에 이름 석자가 조금이라도 오르내릴 만한 사람은 거의 다 선거에 출마하도록 했다. 그 어느 공직도 국회의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거리에는 실업자와 신용불량자가 넘쳐나고 소비는 위축될대로 위축된 가운데 기업투자도 부진하고 원자재난까지 겹쳐 경제는 점점 더 휘청거리고 있다. 일부 기업의 일부 품목 수출이 잘 되어 경제지표가 좋아지고 있지만 이렇게 뜨끈뜨끈한 아랫목의 열기가 윗목까지 연결되지 못한 채 경제에 착시 현상마저 느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누가 뽑히느냐에 국가의 미래가 어느 정도는 걸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결과에 사생결단을 걸고 덤벼드는 모습 속에 불안한 그림자가 비친다. 바로 정치 과잉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안정된 사회라면 이러한 풍토는 진작 사라져야 할텐데 아직도 세대간 이념간 계층간 지역간 갈등이 심하게 부각되는 현실 속에서 어느 당이 국회의 다수당이 되느냐가 너무도 중요한 차이를 낳게 되고 그래서 선거 때마다 올인이니 사생결단이니 하는 말들이 무성하게 들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 정치에 올인하고 뒤엉켜 싸우는 동안 중국 경제는 쾌속 성장을 통해 질주를 계속하고 있고 일본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다. 세계화의 태풍이 거센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올인해야 할 대상은 경제문제인 데도 별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애써 이룩한 1만달러 고지를 내주고 후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 위기상황에서도 자기 당 찍으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해결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목소리만 드높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17대 국회가 이룩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만성적 정치 과잉의 해소다. 정치개혁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 분야 자체의 비중이 줄고 정치에 대한 올인과 사생결단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가 아니라 정상근무일로서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차분하게 진행할 수 있는 분위기,나아가 정치 과잉이 해소되고 갈등이 봉합되는 내실있는 분위기가 17대 국회 동안에 조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chyun@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