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97년 '4개년 방위검토보고서'(QDR)를 통해 탈냉전시대 미국의 군사전략을 평가하면서 '비대칭적 위협'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적들은 장차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테러 마약 대량살상무기 정보전 등의 수단을 사용할 테고 그러므로 '전 영역에서 우위를 달성해도 모든 전쟁(위협) 대처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케니스 맥킨지 교수가 2000년 미 국방대학 연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한 '멜로스인의 복수'라는 보고서에서 보다 구체화됐다. 멜로스는 BC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치른 펠로폰네소스 전쟁중 아테네에 의해 멸망된 도시국가다. 동맹제의 거절을 이유로 멜로스를 침공한 아테네는 남자는 모두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아테네가 지정학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멜로스를 공격한 건 그들에게 보복능력이 없었던 탓이라는 게 맥킨지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날엔 그러나 다양한 수단이 존재하는 만큼 미국은 언제라도 보복 가능한 멜로스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힘의 절대적 우위에 상관없이 약소국에 굴복해야 할지 모르는 '비대칭적 위협'에 처해 있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가 나온지 1년이 안돼 미국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파괴되는 9·11사태에 직면했다. 건국 이래 처음 본토를 공격당한 것이다. 미국은 즉각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 등 '비대칭적 위협'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아프간전과 이라크전을 감행하고 대북 강경책을 쏟아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라크에서의 사상자는 늘어나고 미국내 테러 위협 또한 가시지 않는 가운데 상원 건물에서 치명적인 백색가루 '리신'이 발견돼 건물이 폐쇄되는 등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다. 2001년 탄저균 소동 이래 다시 유독물질 공포에 떨게 된 셈이다. 거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국경없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디지털시대에 보복수단은 더욱 늘어날 게 뻔하다. 따라서 적을 지목하는 한 미국이 '멜로스인의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힘의 논리가 무너지는 지금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