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국경제신문 다산칼럼 '집단소송제도와 경제'에서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은 '배심원 제도와 처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증권집단소송제가 상장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해서 경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실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칼럼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증권집단소송을 도입하기 전에 그 제도가 미국경제에 미친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에서 집단소송이 원래 취지와는 달리 변호사의 돈벌이 장치로 전락한데는 배심원 제도와 처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한 몫을 했다. 하지만 소비자 집단소송과는 달리 대부분의 증권관련 집단소송은 회사와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간의 타협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증권집단소송에 관한 한 배심원 제도와 처벌적 손해배상은 별로 관계가 없다. 이런 점에서 존스 명예회장의 논지는 설득력이 없다. 집단소송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허위공시 등으로 손해를 본 주주는 회사와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소액주주도 선정당사자 제도를 통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소액주주가 소송에 참가하겠다는 동의를 일일이 받기 어렵기 때문에 소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히지 않는 한 손해를 당한 주주 전체를 원고 집단으로 간주해 소송을 하는 것이 집단소송이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증권집단소송이 기업의 부정행위를 예방하는 '순(順)기능'보다 다른 '역(逆)기능'이 훨씬 많음을 잘 보여 준다. 많은 경우 어떤 기업의 조치가 사기(詐欺)에 해당하는지,아니면 단지 경영상 선의(善意)의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집단소송 전문변호사들은 기업이 희망적 발표를 하고 나서 주가가 떨어지면 일단 소송을 제기했다. 정말로 허위공시 등이 있은 경우라 할지라도 부당한 이익을 본 것은 주식을 미리 처분한 대주주나 경영진이지 회사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회사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은 주주에게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한다. 미국에서 증권집단소송은 대부분 변호사와 해당 기업간의 타협으로 해결됐다.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회사는 막대한 법률비용을 각오해야 하고,소송과정에서 온갖 정보가 공개되며,또한 소송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판결까지 가면 승소할 수 있는 경우도 기업은 변호사와 협상으로 문제를 매듭짓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면 부정행위를 응징한다는 증권집단소송의 입법취지는 무색해진다. 이런 협상을 하는 당사자가 회사 경영진과 변호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만일 부정행위가 있었다면 그 책임은 경영진에 있는 것인데,이들이 회사돈을 원고집단을 대표한다는 변호사에게 건네 줌으로써 사건을 타결 짓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책임질 사람은 멀쩡하고,변호사는 거액의 보수를 챙겨 가며,그 대신에 회사 가치는 더욱 폭락해 주주는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허점을 노리고 변호사들이 걸핏하면 집단소송 제기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 의회는 지난 1995년에 '증권소송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인해 증권집단소송을 제기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소송 건수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 이 법률이 미국 주식시장에 미친 영향도 흥미롭다. 의회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집단소송에 시달렸던 하이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올라갔다. 집단소송 변호사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많이 받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주가가 떨어졌고,의회가 상ㆍ하원에서 각각 3분의 2 찬성으로 법안을 재가결하자 주가가 다시 올랐다. 미국의 주식투자자들은 증권집단소송을 주주를 보호하는 장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주에 대한 위험요소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책담당자들과 입법자들은 이 같은 미국의 경험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sdlee51@hotmail.com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