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56). 한국어를 모르는 벽안의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경험한 18개월간의 모험. 그의 짧다면 짧고,길다면 긴 여행은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그는 한국민에게 정말 많은 것을 남겼다. 직접적으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를 통해 한국민은 하나가 됐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을 해냄으로써,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원칙과 기본을 중요시하는 그의 철학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기본이 중요하다=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체력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축구는 뛰어야 하는 운동이고 따라서 축구선수라면 90분 내내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단순히 달리기만 해서도 안된다. 유럽의 덩치 큰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파워도 갖춰야 한다. 그래서 그는 힘을 강조했다. 월드컵을 몇달 안남기고 벌어진 골드컵 대회때 그는 뭇매를 맞았다. 선수들은 강도 높은 훈련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풀지 못했고,국내 축구인들은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히딩크는 옳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은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우승후보들을 연달아 녹다운시켰다. ◆명성이 아닌 능력이다=그의 잣대는 '능력' 한가지에 맞춰졌다. 이 와중에 스타의식에만 젖어있던 선수들은 월드컵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대표선수에 뽑혔다는 사실로 선수들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내부경쟁을 부추겼다. 또 가혹하게 조련했다. 한 선수가 서너개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훈련강도는 셌다. 능력이 없는 선수는 중도에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다=월드컵이 열리기 1년 전 한국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때 히딩크 감독은 "세계 최강인 프랑스를 이겨보겠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대결 결과는 0-5 패배. "그러면 그렇지" 하며 자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강호들과의 평가전에서 잇따라 대패했다. 그러나 그는 월드컵을 50일 앞두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에게선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분석하고,대안을 찾아 목표를 이루어 내려는 치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글로벌화의 촉매=벽안의 감독. 아시아 축구의 맹주를 자처하던 한국 축구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민족의 동질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한국민으로서는 유럽인을 감독으로 맞아들이는 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히딩크와 한국민이 일체감을 느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고통도 따랐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나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은 히딩크의 입지를 좁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대표팀 감독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했고,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리에 한국대표팀은 올랐다. 편협한 내셔널리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한국민들은 깨달았다. ◆하나 된 한국민=한국민은 이번 월드컵에서 하나가 됐다. 한국팀을 응원하는 것만으로 한마음이 된 것은 아니다. 가슴뭉클한 감동이 경기마다 배어있었다. 경기종료 직전 동점골을 터뜨리고,연장전이 끝나갈 무렵 골든골을 넣는 투지. 지치고 아픈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불굴의 정신.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감동을 자아냈다. 그 감동의 이면에는 포기를 모르는 히딩크의 도전정신이 숨어있다. 수세에 몰리면 공격을 더욱 강화하는 모험심을 보여줬고,끝까지 사력을 다해 뛰면서 결과에 관계 없이 그 과정을 즐기도록 요구했다. 그는 '냉혹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결과만이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다. 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