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근처 벨 칼리지(Bell College)에서 3주 정도 지낸 적이 있다. 그 때 지금은 작고하신 하퍼라는 영국 할머니댁에 머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평생 교사로 일하는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했던 기억은 두어번 된다"고 했다. 혈기왕성하고 민족적 자존심이 투철하던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대들을 알고 있는데 그대는 우리를 모른다니…"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했고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었으나,그것은 냉엄한 현실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안돼 한국은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이제는 올림픽보다 더 주목을 받는 지구적 행사인 월드컵마저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고 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것일 게다. 올림픽이 대한민국의 양적 성장의 중간점검이었다면,월드컵은 질적 성장의 성숙미를 보여주는 한민족의 쾌거다.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두말할 것도 없이 '코리아 브랜드'의 이미지 제고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광고를 한다고 해도 이만한 성과를 얻기 어려운 '코리아'라는 상표를 전 세계에 극적으로 홍보한 것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상품은,국가적 역량이 없으면 치러 낼 수 없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기 때문에 신뢰와 애정을 갖고 바라보게 될 것이고,그 경제적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둘째,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세계적인 행사라는 점이다.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딛고 세계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모습은 '속 넓은 한국'의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데 큰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제대국인 일본과 월드컵 행사를 공동으로 치러 낼 수 있는 에너지와 역량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하늘마저 도와 한국은 '염원의 16강'은 물론 '꿈의 8강 고지'를 넘어 '4강의 신화'를 일구어냄으로써 더욱더 감격스러운 월드컵 행사가 되고 있다. 셋째,월드컵 행사를 통해 민족의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국민통합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경제 성장가도를 질주하던 한국이 IMF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제위기로 큰 시련을 겪고,이를 치유해 나가던 중 월드컵 응원을 통해 신바람나는 카타르시스를 마음껏 만끽하고 다시 세계 선진국가로 발돋움해 나갈 수 있는 기운을 얻었다는 것 또한 월드컵이 가져다 주는 성과다. 온 국민이 뭉치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획득은 국가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더욱이 세계 월드컵 역사상 보기 드문 시민 서포터즈 '붉은 악마'의 상대국 응원태도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세계 만방에 보여준 대단히 세련되고 자랑스러운 이벤트로 기록될 것이다. 넷째,히딩크식 축구가 보여준 값진 정치,사회적 교훈이다. 한국인 감독과는 달리 학연과 지연 등의 연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히딩크 감독은 철두철미한 능력위주의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그럼으로써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한국의 고질적인 정실주의가 아닌 객관적 평가만이 영광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입맛에 맞지 않았겠지만 뚝심으로 그 과정을 이겨낸 지금 그 결과는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초대하고,그 국민의 역량을 한층 드높이는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연·혈연이나 인정에 치우친 인재기용의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48년이 지나도 16강 진출이라는 역사적 업적을 성취해 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처럼 능력위주로 선택된 지도자들과 인재들이 정치와 사회,경제 등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때 한국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게 될 것이고,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월드컵의 열기와 국민적 성원이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던 만큼 이 분위기를 잘 살려 국가도약의 에너지화해야 할 것이다. kmkim082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