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한달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월드컵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제 '축제'가 끝난 뒤의 후유증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를 외면했던 학생들, 거리응원전으로 밤낮이 뒤바뀐 젊은이, 근무시간 일손을 잠시 놓아도 "대∼한민국" 구호로 모든게 용인됐던 회사원들, 주방에서 벗어나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한 주부들... 한국팀의 기적같은 승리 행진에 한껏 도취됐던 이들 모두가 월드컵후 냉정한 현실로 돌아가면 '일시적 부적응 현상'이 생길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적지 않다. 회사원 홍경조(27)씨는 21일 "경기가 열리지 않은 19, 20일 이틀동안 오후 3시30분부터 묘한 허전함이 느껴졌다"며 "한동안 이런 느낌이 계속될 것 같은데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이처럼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부 한유숙(53)씨는 "동네 젊은 주부들 중 전날 밤늦게까지 TV를 보느라 잠을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나이든 사람들은 자녀들을 걱정하고 젊은 사람들은 오랜만에 즐긴 해방감 후의 무기력증을 걱정한다"고 전했다. 학생들의 '월드컵 후유증' 걱정은 주로 성적과 이어진 문제들이다. 한국경기가 열릴 때마다 광화문 거리 응원전에 나갔다는 오수진(18.화수고2년)양은 "평생 한번뿐인 행사라고 생각해 무리를 해서라도 응원전에 나갔다"며 "방학을미뤄도 좋으니 학교에서 기말고사를 연기해주면 좋겠지만 아마도 이번 시험은 다들망칠 것 같다"고 한숨을 지었다. 대학생 유재영(26)씨는 "기말고사는 거의 끝났지만 이제 방학이면 집으로 배달될 성적표 때문에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월드컵 열기와 F학점을 맞바꾼 셈"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중에는 이같은 월드컵 열기로 거리에서 분출했던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행여 월드컵후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질될까 걱정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택시운전사 배병오(40)씨는 "한국전이 열리던 날 신촌에서 젊은이들이 차를 잡고 뒤흔드는 바람에 한시간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갇힌 일이 있었다"며 "월드컵 열기에 중독된 젊은이들이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또다른 열광의 대상을 찾을 것 같다"고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학생 백일현(22)씨는 "지난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사회적 문제가 적지 않은데월드컵 분위기에 묻혀버렸다"며 "정치인들은 따분한 사람들이라는 식의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따분한'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는 현실로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의 '축구신화' 뒤편에는 도래할 월드컵 후유증들이 잠재해있어, 이들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분출된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관리하는 지혜로운 처방들이 필요하다는 지적들이다. 서울대 의대 정신학과 신민섭교수는 "그동안 축구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었던 청소년들이 갑자기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며 "부모가 대화를 통해 청소년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대학원의 김희수(28)씨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에너지를 어떻게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논의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월드컵 후유증'만을 걱정하기보다 그간의 심리적 억압 등 이같은 증상을 만들어낸사회적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상희 기자 lilygardene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