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가 체스인지 바둑인지를 두고 있다고 상상했다. 나는 서른 시간이나 걸린 이 대국을 집에서 관전했다. 국면의 전환에 따라 미묘한 표정들이 얼굴을 스쳐가고 손의 모양과 그 놀림이 말보다 더한 어떤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 받다'(김용석·이승환 지음,휴머니스트,1만3천원)는 중견 동.서양 철학자 두사람이 학문과 사상, 문화와 문명, 오리엔탈리즘과 근대성 문제 등을 깊이있게 조명한 대담집이다. 무려 30시간에 걸친 두 논객의 대화에는 현대 지성의 흐름과 새 패러다임, 혼합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지혜가 녹아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의 대담 대국 놀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구경꾼 같았다. 오랫동안의 대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 의해 천상으로 올라간 철학은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려오지 않아도 좋았다. 달과 별처럼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한다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달빛과 별빛이 없다면 우리의 밤은 어두움뿐일 것이다. 무한 식성을 가진 듯한 하이에나와 비슷한 발음의 하이에크와 그 추종자들은 윤리가 없는 경제학을 주장하고 약육강식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이 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것을 '자생적 질서'라고 부르고 있다. 달빛과 별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끼여들 수 없는 경제학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암흑으로 빠져들 것이다. 우리는 이 달빛과 별빛을 인문학이라 부른다. 두 철학자의 말을 엿듣다보니 그들의 속 깊은 생각들이 물이 되어 현실의 섬 사이를 흘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정보 넓이보다는 지식의 깊이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물과 섬이 교류하는 현장에 내가 서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문화 공간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서로 이야기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들은 '우리'가 되었고 '우리 속에 존재하는 사이'를 인정함으로써 집단에 매몰되는 개인을 경계하는가 하면 극단적 개인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관계의 위기를 극복한 것 같다. 어떻게 아느냐고? 대담 후 그들은 서로 긴 편지를 나누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증자의 글을 빌려 '벗'이라 부르고 싶어했고 또 한 사람은 '선술집에서 서로를 위로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는 준비가 기다림 자체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동의한다. 나는 공식적으로 철학자가 아닌 일상 속의 생활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상인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아직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꿈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 구본형 변화경영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