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게재되어 이른바 '신(新) 브레너 논쟁'을 촉발시키며 화제를 모았던 '혼돈의 기원'(로버트 브레너 지음,전용복·백승은 옮김,이후,1만9천원). 이 책은 전문적 지식을 갖춘 학자들 만이 향유하기에는 아까울 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디언(Guardian)지가 '주가폭락이 과연 대공황의 전조를 알리는 것인지 고심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해답의 실마리를 구해야 한다'고 평할 정도로 현재 고조되고 있는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을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차원에서 심도있게 진단한 책이다. 그것은 지난 50년간 세계경제가 경험한 호황과 위기의 궤적을 담은 파노라마이자 아직도 진행중인 불균등 발전과 장기침체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이다. 이 책의 주장이 일반인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세계화의 본질을 비교적 평이한 언어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역사학자로서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발생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단일 주제에 천착해 왔던 저자의 학식과 경륜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힘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그의 단순하면서도 독창적인 시각이다. 저자는 전후 세계경제의 위기과정이 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에 따른 이윤압박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부정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범세계적 전횡에 위기의 책임을 묻는 진보진영의 통설로도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본다. 놀랍게도 이 책은 위기의 진앙지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제조업 부문에서 빚어진 경쟁의 격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제조업 부문에서 증대된 국제경쟁의 압력은 비용절감 기술을 추구하는 기업과 기존의 고비용 기업이 온존하는 구조 속에서 과잉설비를 낳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혁신에 의한 경쟁력 제고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임금을 삭감하고 대량의 구조조정을 행함으로써 위기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한마디로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전개양상을 제조업 분야에서 발생한 투자위기와 장기침체,세계적인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의 발호,임금삭감과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피폐로 점철된 역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진정한 즐거움은 위기와 장기침체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접근방식을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는데 있다. 그의 묘사는 지역공단의 굴뚝산업과 테헤란로의 벤처기업군이 기묘하게 공존하며 여전히 구조조정의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과 그리 멀지 않다. 또한 방대한 자료(물론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방대한 이론적 구도를 그려내고자 하는 저자의 야심은 이 책과 더불어 내년 2월에 출판될 예정인 '호황과 거품:오늘의 미국경제'에서 완성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은 이 책을 읽는 덤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배인철 한국도로공사 경영연구그룹 책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