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마감한 뒤 저승에서 하나의 기억만을 지닌채 영원 속으로 떠나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을 택할 것인가. 8일 개봉될 일본영화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는 동화적 설정을 담은 소품같은 영화지만 대작 못지 않게 철학적 사색을 요구한다. 월요일이 되면 소도시 간이역 같은 린보 역에는 막 이승을 하직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번호표를 받고 배정된 방에 들어가면 면접관들이 수요일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해달라고 주문한다. 선택이 끝나면 린보 역의 역무원들은 각자 선택한 순간을 토요일까지 영화로 제작해 보여준다. 이제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망각한 채 자신이 그리는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면접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 많아 고르기가 힘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통 떠올리기 싫은 기억뿐이라는 사람도 있다. 호색한 같은 웃음을 흘리며 유곽에서 여자를 산 추억을 반추하던 초로의 사내는 결국 딸을 시집보내던 날을 선택하고, 주저없이 디즈니랜드를 꼽은 여중생도 막판에는 어릴 적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귀지를 파던 때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전쟁 당시 허기에 지쳐 있다가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기억이나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시절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칠순을 넘긴 와타나베가 마지막까지 선택을 주저하자 면접관 모치즈키는 그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건넸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한다. 50년 전 모치즈키가 죽기 전에 사랑을 약속한 교코가 바로 와타나베의 아내가 돼 있는 것이다. 모치즈키는 테이프로 교코의 일생을 본 뒤 50년을 미뤄온 선택에 성공해 영원으로 떠나고, 꿈 속을 헤메며 선택 의지를 보이지 않던 X세대 이세야가 수습 면접관으로 린보 역에 남는다. 「원더풀 라이프」는 「애프터 라이프(After Life)」라는 영어 제목으로 미국 등지에 소개됐으며 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사후(死後)」란 제목으로 상영됐다. 95년 장편데뷔작 「환상의 빛」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오셀리오니상과 밴쿠버영화제 용호(龍虎)상을 거머쥐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로 낭트영화제 그랑프리, 토리노영화제 각본상, 산세바스찬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답게 내레이션과 인터뷰만으로 적당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등장인물의 꾸밈없는 표정이나 선명하지 않은 화면의 질감도 사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흔한 특수효과나 컴퓨터그래픽 없이 이처럼 저승세계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긴박감 없는 줄거리와 밋밋한 화면이 118분의 러닝타임을 길어보이게 만들지만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 중 열에 일여덟은 행복한 순간을 고르기 위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민에 빠지고, 나머지 두세명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달콤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삶의 고삐를 더욱 당길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