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만큼 관료적인 곳도 없다.

모든 접근은 공보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들 국제금융기구의 내부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만나더라도 내용있는 얘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두 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의 대(對) 한국기자 ''정보 감추기''는 외국인 직원들보다 더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일에 대해서도 내부규정을 들먹이며 신주단지 감추듯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앉은뱅이 돌아앉으며 요강 감춘다"는 속담이 연상될 정도다.

이런 IMF가 지난 19일 난데없이 한국기자들만을 불러 브리핑을 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이 괜찮다''는 발언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겠느냐는 게 한국특파원들의 짐작이었다.

예상한 대로 호리구치 요스케 IMF 아·태국장과 아자이 초프라 한국과장은 "한국경제의 거시지표가 결코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한국경제가 위기라고들 하지만 올해 성장률은 두 자릿수가 될 것이다.

내년에는 다소 그 성장률이 위축될 예정이지만 그래도 5%내지 6%대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죽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수출은 견조한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외국인 직접투자와 주식투자자금의 유입도 많고, 환율 실업률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이며, 외환보유고도 그 어느 때보다 많다"는 게 이들의 평가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흘러간 그 노래였다.

지난 3일,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이 되는 날 데이비드 코 IMF 서울사무소장이 발표했던 내용의 재탕(再湯)이었다.

한 기자가 "오늘 브리핑이 지난 3일 IMF서울사무소가 내놓은 평가와 다른 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석한 한국관료가 "그동안 여러가지 상황이 바뀌지 않았느냐"는 궁색한 답변을 내놨다.

과연 지난 2주간 상황이 바뀌었다면 얼마나 바뀌었을까.

바뀌었더라도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그런데도 IMF의 평가는 장소만 바꿔 상영한 긍정일색의 재방영에 불과했고 뭔가 기대하고 회견장을 찾았던 기자들이 ''늑대소년에게 당한 마을 사람들''의 신세를 또 맛보아야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IMF의 평가대로 한국경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부분을 덮어놓고 부정적인 쪽만 강조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IMF관리체제를 조기 탈출했다며 샴페인을 서둘러 터뜨린 정부의 ''업적 부풀리기''야말로 한국경제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를 그대로 사장(死藏)시켜 버린 주범이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되뇌면서도 정작 그 기회를 활용할 단계에 이르러선 사탕발림에 현혹됐던 정부의 단견이 한국경제를 오늘에 이르게 한 패착이었다.

공적자금은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그 투명성이 실종된 채 국민부담으로 남아있다는 게 국민들의 인식이다.

주식시장과 벤처기업은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다.

기업들은 이자도 제대로 건지지 못하는 수익성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1만원권 한 장 쓰기를 두려워하는 상황이며 근로자들은 구조조정으로 거리의 실업자로 내몰리고 있다.

반도체가격은 한없이 떨어졌고, 유가는 두배이상 올랐으며 잘 나가던 미국경제는 요즘 날씨만큼이나 싸늘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구조조정은 기업과 은행에만 해당되는 용어일 뿐 공무원들과 공기업의 모럴 해저드는 극에 달해 있다는 국민들의 원성이 높다.

이런 판국에 "한국경제,그래도 괜찮다"는 외침은 청중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공허한 무대행위에 불과하다.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