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히로타로 아사히맥주 명예회장의 목소리는 허스키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신념과 지혜, 그리고 경험을 들려줄 때는 언제나 힘찬 어조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일본의 잘못된 규제와 관행을 뜯어 고치자는 개혁파 인사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과 관련, "현상유지는 후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가지지 않으면 새로운 세기에 대응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들도 지금까지는 이윤추구에 치중하는 빅 컴퍼니를 지향했지만 앞으로는 글로벌시대를 맞아 사원, 고객을 포함한 다수를 만족시키고 사회에 공헌하는 회사로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했다.

재계 원로로 일본경제의 회생과 활력 회복을 위해 뛰고 있는 그를 도쿄시내 아사히맥주 본사에서 만났다.

< 만난 사람 = 양승득 도쿄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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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 맥주를 업계 1위로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전례가 없다.
그러니까 한다"며 임직원들에게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위험이 따를 수도 있는 특이한 사고방식인데 이같은 신념의 배경은.

◆ 히구치 명예회장 =나는 은행원 출신이다.

은행원들은 일반적으로 돈을 빌려줄 때 대출금 회수의 가능성을 중시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빌려 달라는 측의 인품, 성장환경, 능력, 프로젝트 내용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히구치 명예회장은 스미토모은행에서도 엘리트코스를 거친 후 일본에서는 보기 드물게 입행 24년만에 임원이 됐을 정도로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다)

아사히맥주에 처음 왔을 때 회사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고 사기가 떨어져 있어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원들의 사고방식부터 바꾸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사장이 되기 전까지 맥주업계 사정에는 문외한이었다.

선입견을 버리는데 앞장서고 기존의 관행과 룰을 뒤엎는 조치를 잇달아 내렸는데 이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 같다.(그는 사장 시절 ''원료는 아무리 비싸도 좋은 것을 쓰라, 공장은 이익관리가 필요 없다'' ''라이벌에게 자신의 점수를 매겨달라고 하라''는 등 파격적 방침을 제시하고 이를 밀고 나간 일화를 남겼다)

- 하지만 "전례가 없으니 한다"는 식의 경영은 실패 확률도 높지 않겠는가.

◆ 히구치 명예회장 =지도 없이 하는 항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삐끗해도 난파되거나 좌초될 위험이 크다.

배의 선장격인 사장은 이런 상황일수록 용기와 냉정한 판단력, 인내, 체력과 지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조건이 바닥을 드러낸다면 사장으로서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이익을 낼 책임은 사장에게 있고 부사장 이하는 꿈을 이야기하라고 강조했다.

- 기술자와 메이커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히구치 명예회장 =일본에는 쇼쿠아킨도(職能人)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도공예쪽에서 나온 말인데 기술자들도 상인의 감각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품질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기본 임무지만 그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이러한 의도를 갖고 만들었고 이렇게 쓰는게 좋다는 걸 고객에게 알려야 되며 이를 위해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메이커는 다이콘야쿠샤(大根役者)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서투른 단역 배우라는 의미인데 감독인 소비자와 연출자인 중간상이 주문하는 대로 자신의 역을 충실히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개발한 제품이니까 써 주세요''라는 태도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고객과 특약점 유통업체들의 솔직한 의견에 겸허히 귀기울이지 않으면 히트상품은 태어나지 않는다.

- 재계 원로이면서도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는 개혁파의 대표적 인사로 손꼽히는 이유는.

◆ 히구치 명예회장 =나는 항상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해 나가는 사고를 갖고 있다.

현재와 같이 변화가 극심한 시대를 맞아 일본경제가 내부적 비효율과 제도적 피로를 씻어내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한다면 이는 후퇴나 마찬가지다.

또 새로운 세기에 대응하지 못한다.

- 일본이 경제활력을 되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 히구치 명예회장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지나치게 결과의 평등을 중시하는 일본형 사회시스템을 변혁시키고 개개인이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건전하고 창조적인 경쟁사회''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사회에는 열심히 노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결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모럴 해저드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고 경제활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도 불운하게 경쟁에서 진 사람들에게는 ''패자부활''의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 안전망을 충실히 갖춰 놓으면 건전하고 창조적인 경쟁사회가 보다 원활히 돌아갈 수 있다.

- 일본에서는 올해 우유식중독사고와 자동차리콜 은폐 등 기업의 모럴 해저드와 관련된 사건이 유독 많았다.

◆ 히구치 명예회장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경단련의 기업행동헌장에서는 회원 기업들에 (제품의) 안전성을 최대한 배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헌장 준수를 보다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그는 현재 경단련 평의원회 부의장을 맡고 있다)

- 일본정부는 5년 이내에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대국으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는데 그 가능성은.

◆ 히구치 명예회장 =상당히 높다.

일본은 현재 세계 최고인 미국보다 땅 덩어리가 훨씬 작다.

따라서 나라 전체의 첨단통신 네트워크 구축경쟁에서 그만큼 유리하다.

하이테크 산업의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게이오대학의 무라이 준 교수(컴퓨터 커뮤니케이션)를 비롯해 5년이 아니라 3년 내에 세계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 미국과 일본에서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는 등 신경제의 장래에 적신호가 적지 않은데 이에 대한 견해는.

◆ 히구치 명예회장 =인터넷 벤처기업의 주가 추락은 그만큼 그동안 거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인터넷벤처들의 앞날을 밝게 보는 편이다.

주가를 따로 떼어 놓고 본 개별 기업들의 수익성과 매출 등 외형과 실속은 점차 호전되고 있지 않은가.

또 자질이 뛰어난 젊은 경영자들도 많다.

- 비즈니스맨의 자질과 사회 초년생들의 몸가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신데.

◆ 히구치 명예회장 =비즈니스맨은 항상 활달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알아 듣기 쉽도록 이야기하고 밝은 표정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신입사원과 같은 사회 초년생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인사를 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앞장서 일하는 자세를 몸에 갖춰야 한다.(그는 밝은 표정에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트레이드마크로 알려져 있다. 아사히맥주 사장 시절 직원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옷매무새가 단정치 못하거나 인사성 없는 직원들에게는 직접 야단을 치는 일도 잦았다. 재계모임에서도 구석 구석을 큰 소리로 인사하며 다녀 목소리만 듣고도 ''히구치가 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정도다)

- 본사 공개홀에 미술관을 갖춰 놓을 정도로 문화와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히구치 명예회장 =본사에 모네의 그림 원본을 갖고 있다.

미술관은 회사 직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다.

직원들이 미술품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면 그 감동과 감성으로부터 신제품개발 의욕이 샘솟을 수 있다.

고객과 직원 가족들이 자유롭게 참가하는 음악회도 자주 열고 있다.

스포츠는 하지 않더라도 관람을 즐기고 오페라를 특히 좋아한다.

- 새로운 세기에 기업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 히구치 명예회장 =기본적인 생각은 꿈이 없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것뿐 아니라 전향적인 발상과 직원 개개인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경영자의 임무다.

기업에는 사원집단으로서 기업의 꿈이 따로 있다.

꿈의 실현 과정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사회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는 기업이 되는 길이다.

효율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 경영으로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동질성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이제는 같은 업계 타사와의 점유율 경쟁에만 매달려서는 곤란하다.

기업 경영전략의 원점은 고객에서 출발해야 한다.

- 한국경제의 장.단점을 한가지씩 꼽는다면.

◆ 히구치 명예회장 =대단히 근면한 국민성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식을 무엇보다 큰 자산으로 들고 싶다.

하지만 해외진출 기업들이 철수 결정을 너무 서둘러 내리는 것 같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침착하게 판단을 내리면 좋지 않을까 싶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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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구치 히로타로 누구인가 ]

히구치 히로타로(74) 아사히맥주 상담역 명예회장은 "경영의 달인"이자 일본 재계를 이끌어가는 핵심 원로중 한명이다.

1926년 교토 출생으로 49년 교토대 경제학부 졸업후 스미토모은행에 입사, 대표이사 부행장까지 올랐다.

제조업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지난 86년 아사히 사장을 맡아 퇴출기로에 있던 회사를 맥주시장의 선두로 끌어 올렸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일을 밀어붙인 그는 아사히 사장 시절 "당신은 당장 해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단 한명도 해고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사장을 맡기전 경영난 때문에 회사를 떠난 옛 직원들의 복직을 앞장서 추진할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도 깊어 장애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데 발벗고 나섰으며 지금도 아사히는 일본의 전체 상장기업중 장애자고용 비율이 가장 높다.

그는 지난 98년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 의장을 맡아 일본경제 회생을 위한 밑그림 만들기에 온 힘을 쏟았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회의, 강연 등 각종 대외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