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 < 소설가 >

안녕하세요.

여기는 네팔의 둔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히말라야 랑탕 근처에 있는 고사인쿤드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해발 4천5백미터 이상의 고지라 고산병을 예방하는 약을 먹었지요.

얼마나 추운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너무 추우니 뇌세포도 반항하나 봅니다.

숭숭 뚫린 통나무 벽면으로 새벽 햇살이 내비쳤습니다.

치약,썬 스크린,로션,생수,모두 꽝꽝 얼었어요.

얼지 않은 건 사람뿐입니다.

인간은 지독하게 강합니다.

끈질긴 종족이죠.

며칠동안 세수도 못하고 이도 못 닦았어요.

산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비슷한 실정이에요.

모두 같이 세수를 안 하니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어제는 11시간 동안 하산했습니다.

하얀 설산의 빙판과 가파른 계곡,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을 지났습니다.

지금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닙니다.

어그적어그적 걸어요.

층계 내려올 때가 가장 끔찍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굉장한 경험이죠.

평생 못 잊을 겁니다.

여행길에 몇달씩 때론 일년이 넘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부분 유럽인들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미국인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죠.

미국인의 삶은 훨씬 타이트합니다.

미국인의 레저는 쇼핑입니다.

주말에 쇼핑몰을 돌고 주중에는 신용카드로 긁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 쉼 없이 일합니다.

한 달 이상 직업이 없다면 아마 불안해서 미칠지도 모릅니다.

매달 지불해야 하는 월부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서 유럽인들은 좀 더 여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트래킹 중에 만난 네덜란드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작년에 아홉달반 동안 세계 곳곳을 함께 여행한 후 결혼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가 생기면 절대로 여행갈 수 없는 곳들만 골라서 3주 동안 떠돌아다니는 중입니다.

그 나이에 직장을 제끼고 놀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혹시 대단한 재산가이거나 재벌의 자식이 아닐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지극히 평범한 도시인입니다.

남편인 홈스는 37세로 ING베어링이라는 은행에서 일하고,부인 엘렌은 36세로 트레이닝 컴퍼니에서 일합니다.

결혼하기 전 홈스는 회사에 긴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그의 회사에서는 집안 식구가 아플 경우 6개월 정도 휴가를 줍니다.

그러나 놀기 위한 사람에게는 턱도 없는 얘기죠.

결국 홈스는 은행에 사표를 던지고 떠났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여행 경비는 살던 집을 빌려준 돈과 그 동안 모아둔 것으로 충당했고,여행 중에 사랑에 빠진 엘렌과 결혼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전에 다니던 은행에 복직했고 승진까지 했습니다.

꽤나 능력이 있는 은행가였던 모양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은행가를 "회색 쥐"라고 부릅니다.

모두들 회색 싱글 양복에 비슷한 표정,비슷한 말투와 비슷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규적으로 보스를 찾아가 친근하게 사적인 잡담을 늘어놓는 것 또한 비슷합니다.

은행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전문직종으로 진화해 가는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 복직한 자리는 담보를 잡고 자금대출을 하는 특별부서 입니다.

은행은 그에게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를 요구하지만 그는 "제너럴리스트"이기를 고집합니다.

그는 시스템에 저항합니다.

가끔씩 노타이 차림에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출근합니다.

홈스가 말합니다.

"나는 은행 쪽에서 보면 부담스러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닐지도 모르죠.모두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감을 느낍니다.
미래를 그 누가 알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규율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홈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은행 같이 규격화된 환경에서 홈스 같은 반항아가 없다면 변화도 발전도 없을 겁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언제나 모두 정상일까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라는 굴레가 부여한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겠지요.

창 밖을 바라봅니다.

어둠에 휩싸인 히말라야는 말이 없습니다.

히말은 또 어떤 얼굴로 내일을 맞이할까요.

히말이 항상 같은 모습이라면 도전의 값어치는 절감될 겁니다.

인간이 히말에 오르는 것은 저 웅대한 원시의 자연 속에 감추어진 저항 때문이 아닐까요.

서울에는 봄바람이 부나요?

뭔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은 기다림에 가슴이 설레입니다.

새봄이 오면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잖아요.

usedrea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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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번째 히말라야 여행에 나선 소설가 김미진(38)씨가 한국경제신문 독자들을 위해 네팔에서 보내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