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미국경제의 불황은 골프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5년 USGA멤버가 7백67명으로 줄어들었고 투어 프로의 대회상금 액수도
절반이상으로 삭감됐다.

어떤대회는 아예 취소되거나 중단돼 버렸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2명의 프로골프 아내가 식어가는 프로골프대회에
앞장서 골프열기에 불을 붙인다.

그중 한명이 토미 아머의 아내인 에스텔라였다.

그녀들은 돈 많은 골프광들에게 전화로 조건을 제시해 스폰서 승낙을
받아내곤 했다.

텍사스 석유회사 거부들이 스폰서로 참여한 이후 그 열기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27년 로스엔젤레스오픈 총상금이 1만달러였다.

당시 이 금액은 상상도 못할 큰 액수였다.

그당시 미 골프계의 정상에 있던 토미 아머(Tommy Armour, 1895~1968)의
이야기다.

스코틀랜드 태생인 그는 골프역사상 가장 화려했고 전설적인 골퍼로 통한다.

한때였지만 아이언 게임은 당대 최고의 경지였으며 주량과 입심은 월터
하겐이나 상대할 정도였다 한다.

그의 애칭 "Silver Scot"은 스코틀랜드 출신에다 젊은 나이에 백발이 돼
붙여진 이름이다.

요즈음 생산하는 토미 아머 아이언 클럽에 "Silver Scot"이 붙은것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세계1차대전당시 탱크부대 기관총 사수였던 그는 전쟁에서 부상당해
한쪽눈을 실명했고 왼팔과 머리에는 평생 쇠붙이를 붙이고 살아야 했다.

병원에서 회복기간 중 그는 골프를 직업으로 택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손은 유난히 커서 바나나송이만 했다고 한다.

1920년 프랑스 아마오픈을 제패한 후 미국으로 건너온다.

1927년 US오픈, 캐나다 오픈 등 6개 대회를 석권했다.

1930년 PGA챔피언십에서 당대 최고 선수였던 진 사라젠을 3홀차로 이겨
매치플레이어로서의 면목을 과시한다.

그는 1931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정사에 올랐으며 1935년까지 같은 대회에서
4년연속 2위를 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후 그는 골프지도와 클럽제작에 몰두했는데, 당시 그의 레슨비는 보통사람
의 한달치 월급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저술한 2권의 책은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많은 골퍼가
애독하고 있다.

1940년 USPGA명예의 전당, 1976년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근 70세가 넘어서도 겨울에는 플로리다 보카 라톤CC에서, 여름이면 뉴옥
윙 풋 클럽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많은 친구, 팬들과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전 미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