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단행된 개각은 대체적인 시기와 폭이 예고됨에 따라 분분한 관측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막판까지 유임과 교체가 엇갈리는 등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신임 장관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임명장을 수여한 뒤 "제1기 내각은 하드웨어를 마련한 내각이라면
제2기 내각은 원활한 행정을 위해 소프트웨어를 강화하는 내각"이라고 강조.

특히 정치인 장관을 대거 교체한 것과 관련, "정치인 출신이 내각에 있다
보면 선거에 말려들기 쉬우므로 행정부가 일관성있게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이같은 개각을 단행했다"고 설명.

이와 함께 "5대 재벌의 개혁은 올해중 반드시 마무리해야 한다"며 "세계가
우리나라 재벌 개혁이 부진하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다과회에서 김종필 총리에게 먼저 인사말을 하도록 배려
했다.

<>.김중권 청와대비서실장은 이날 "3~4명의 장관은 어제 밤 11시가 돼서야
통보했다"고 밝혀 막판 진통이 적지 않았음을 시인했다.

특히 김 대통령은 이해찬 교육부장관, 김 총리는 김모임 보건복지부장관의
유임을 각각 희망해 서로 의견 충돌을 빚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어느 한 쪽만 물러나게 할 수 없어 "패키지"로 경질처리 됐다.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경우 의원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며
유임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박지원 전 청와대 공보수석이 문화부장관으로
발탁된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 신임 장관은 그동안 입각설과 관련, "유임될 것"이라고 연막을 피우면서
보안을 유지했다.

김 대통령은 박 장관에게 입각 언질을 줘 놓고도 23일 늦게까지 다시
잡을까 고민하다가 청와대를 벗어나고 싶다는 박 장관의 희망을 확인한 뒤
결국 입각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치인 사정 파동과 검찰 내부의 "항명"사태로 곤욕을 치른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 신건 국정원 제2차장을 제치고 법무장관에 발탁된 것도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의 경합이 치열했으나 박상천 전 장관이 강력히 천거한데다 김
대통령도 "정치력"과 "충성심"을 높이 사 김 전총장을 최종 낙점했다.

<>.경제팀중에서는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진념 전 기획예산위원장,
이헌재 금감위원장, 정덕구 전 재경부차관 등의 활용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고심했다는 후문.

서열상 "선임"인 재경부장관에 당초 진 전위원장의 기용이 유력하게
점쳐졌지만 김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해온 강 전 수석이 연공서열을
깨고 입각했다.

정 전 차관의 경우도 금감위원장을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원장이
금융 및 재벌개혁을 진두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임됨에 따라 산자부
장관으로 낙점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입각한 장관중에서는 김성훈 농림부장관이
유일하게 유임됐다.

김 장관의 유임 이유에 대해 농림부 안팎에서는 우선 농.축협 등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의 개혁 작업을 뚝심있게 추진해온 점이 높게
평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아들 병역문제, 고관집 절도사건 등에 연루돼 어려움을 겪었지만 김
장관의 결백이 입증됨에 따라 오히려 도덕성 측면에서 플러스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인선에서는 김중권 비서실장과 김한길 정책기획수석 등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김정길 정무수석 등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총리도 독자적으로 인사 대상자를 선정하지 않고 청와대 측에서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선 작업에 참여하는 등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청와대
주변 인사들이 전했다.

또 여성 각료 인선 과정에서 모대학 총장 등 교섭대상자들이 "고사"하는
바람에 23일 오후에야 존안자료를 챙기는 등 곤욕을 치렀다.

< 정치부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