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 < 한국외국어대 교수. 경제학 >

군사정권 시대에 우리나라 서점의 인문사회분야 서가는 사회주의 계열
서적의 홍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적 자유를 박탈당한 것에 대한 거대한 반발로 이해된다.

흥미로운 것은 문민정부 시작과 더불어 급격히 쇠퇴했던 사회주의 계열
책자가 최근 국민의 정부 이후 다시금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좌파 진보주의 정당들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본래의 사회주의 정치이념을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상품으로
재포장해 제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새로운 이념이 세인의 주목을 상당히
받고 있다.

제3의 길을 논의.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의 길과 제2의 길이 각기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제1의 길은 옛 좌파, 즉 구식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으로 평등과 복지국가를
강조하며 정부 기업 노조가 관여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이 시장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제2의 길은 신우파, 즉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여 평등보다 효율을 강조하고 복지국가는 대체로 악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제3의 길은 제1의 길과 제2의 길을 결합하는, 즉 자유시장경제의 바탕위에서
국가개입의 조화를 도모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제3의 길은 과연 새로운 길인가.

전통적 좌파.우파간의 이념과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창된
제3의 길은 새로운 시도도, 새로운 개념도, 새로운 용어도 아니다.

용어상으로 볼 때 일찍이 스웨덴에서는 중도(Middle Way)라는 말이 사용
되었었고, 대부분의 다른 유럽국가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용어를 갖고 있었다.

제3의 길의 주창자인 기든스(Giddens)는 제3의 길을 "현대 사회주의의
재생과 성공으로 가는 길로 파악하면서 단순한 좌우의 타협이 아니라 중도
또는 중도좌파의 핵심적 가치를 취하며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가 블레어와 이론가 기든스 모두 그들의 이념이고 신념인
사회민주주의의 복원에 전력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공격앞에서 무력해진 진보진영의 대안제시가 다름아닌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에서 나오면서 사회주의 전통의 단순한
계승이 아닌 재구축과정이라 주장되고 있다.

문제는 재구축의 대상과 내용이 무엇인지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기고자가 보기에는 제3의 길은 빨간빛(red) 이념에서 분홍빛(pink)이념으로
변화된 기본적으로 신좌파 진보주의 또는 개량사회주의 이념이다.

방향성에 의해 이념적 목표 또는 이상향을 달성하려는 과거의 이념적 좌표
중심의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한 정책적 물음, 즉 선거에 임하면서
내세우는 구체적 정책에서 세계와 인간을 해석하는 실용주의적 입장이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은 이론으로 완벽히 무장된 이념이기보다는 현실정치의 산물이다.

제3의 길이 한국의 길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사회가 제1의 길과 제2의 길, 즉 옛 좌파와 새
우파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했느냐, 그리고 본질적으로 제3의 길이 무엇이냐
에서 찾을 수 있다.

기고자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는 아직 제1의 길에 놓여 있다.

최근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으나 우리 사회는 고전적 개인주의 자유주의
와 시장경제 논리가 지배적인 이념인 사회가 아니며 그러한 경험을 한 바가
없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평등 형평우위사상이 지배하고 있으며
경제는 시장주의가 아닌 집단주의 정치논리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우리의 정부는 제한된 작은 정부가 아니며 무소불위의 정부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볼때 우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제1의 길의 상태에 처해
있다.

우리의 갈 길은 따라서 제2의 길이다.

시장이 질식상태인 부문이 너무 너무 많다.

농업 교육 보건 복지 문화 등의 부문에 시장이라는 햇빛정책이 절실히
필요하며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는 제3의 길의 한국적
수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결론인 것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