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라퐁텐 < 독일 재무장관 >

시장경제는 현대 사회를 규정하는 기본 틀이다.

그러나 "자유시장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시장"은 반드시 일정한 정치적 규율이 갖춰진 틀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회 민주주의가 추구해온 "사회적 시장"이나 "생태학적 시장"모델은
한 국가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경제관계에도 적용돼야 한다.

시장은 단순히 자유롭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환경에 대한
책임을 전제로 구축돼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민주주의의 철학에 기반한 자유시장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인 공조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적 규율에 의해 지도되는 시장경제가 그저 공상에서나
가능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해선 안된다.

몇년전까지만해도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유럽단일시장도 이미 현실로
이뤄졌다.

유럽단일 시장은 유럽인들의 이상이 구체적인 정치의 현장에 어떻게
접목되는 지를 확인시켜준 사례다.

이같은 국제적인 협력이 유럽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구촌 어디에서도 협력과 공조가 가능하다.

더욱이 국제적인 협력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여건도 무르익은 상태다.

오늘날 고도로 세계화된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큰 기둥인 국제 무역및
투자의 흐름은 이른바 "세계 경제의 3두마차"로 일컬어지는 유럽 미국
일본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다 유럽연합(EU), 선진7개국(G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등 국제적인 공조를 주관할 조직적인
기반도 얼마든지 갖춰져 있다.

제도적 장치가 없어서 국제협력이 지지부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국제협력이 필요한 의제들에 대한 명확한 지도이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적인 협력은 대략 다음의 7가지 경제정책 과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은 환율안정이다.

각국의 외환시장이 불안할 경우 세계공동의 이상을 향한 행군에서 발을
맞출 수가 없다.

땀흘려 쌓아온 성장과 번영의 탑도 허물어지게 된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지구촌에서 가장 활력있던 이 지역을 어떻게
초토화시키고 있는 지를 우리는 작년 한햇동안 보아왔다.

다른 지역에서 아시아와 비슷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현재로서는 없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각국의 환율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국제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국제환율 제도에 개선해야할 문제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를
고쳐가야 한다.

환율안정을 위해 일보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는 환율안정을 통해
우리가 공동으로 거둘수 있는 과실에 비하면 아주 작을 것이다.

금리 문제에 있어서는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저금리 정책은 고용을 늘리고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따라서 미국 일본 유럽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실질 금리를 낮추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최근 주요 선진국들이 금리를 내린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며 앞으로도
이같은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다음 과제로는 고용을 최우선으로 하는 재정정책을 꼽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구조화되고 있는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주의할 점은 재정적자를 줄이는 과정에서 경제성장이 둔화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모순되는 듯한 이런 정책 목표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기술혁신을 북돋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그칠줄 모르는 역동적인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어야만 공공재정을 효율적인
구조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균형잡힌 조세 정책 또한 필수적이다.

EU집행위원회가 96년 4월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각국은 법인세를
경쟁적으로 경감하는 대신 근로자들에게 세금을 더 물림으로써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이로인해 구매력이 위축되면서 내수침체와 대량 실업은 물론
외채가 급증하고 투자가 격감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나아가 고용창출 여지까지 줄어들었고 정부로써는 그나마 부족한 재정을
사회복지 부문에 쏟아부어야 했다.

그 결과 국가채무가 급증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EU는 이같은 점을 고려해 유럽 전역에 걸쳐 최소세율을 적용하자는
세제통합(Tax Union)을 제안했었다.

최소세율은 "사회 안전망"과 같이 기업들이 공공 서비스 부문을 위해
일정액의 재원을 기여하는 방식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 국가들 간에 조세정책의 통일을 놓고 이견이 빚어지고 있으나
이를 극복해야 진정한 통합을 이룰 수 있다.

기술부문에 대한 정책의 일관성도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이 시장을 확대시키고 고용을 늘려 경제 성장을 유도해낸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경제가 한단계 높은 구조적인 진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신기술이다.

하지만 개별국가의 역량으로는 연구.개발(R&D)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주항공 분야만 봐도 그렇다.

따라서 각국의 기술력과 연구시설및 기업들의 노하우를 한데로 모아
극대화 시킬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사회 강령"을 수립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인권과 노동자의 권리보호
제도를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최근 범세계적인 "최소 사회보장기준"의 필요성을 주창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미국 정부는 WTO에 한 사회가 보장해야 할 "핵심 권리"에 관한 목록을
제시했었다.

노조연맹의 자유, 단체교섭권 보장, 강제 노동 금지,어린이 노동 착취
근절, 고용이나 직장내에서의 차별금지 등이 골자다.

EU역시 "사회적인 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유럽통합은 통화통합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통합이 어우러질
때 이뤄질 것이다.

끝으로 각국가는 환경파괴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환경 문제는 이미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로 현실화돼 있다.

한국가에서 야기된 공해는 곧바로 이웃나라로 전파되고 상품의 이동을
통해 전세계로 옮아간다.

환경문제에는 범지구적인 이해가 걸려있고 따라서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환경친화적인 경제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선진공업국들이 세제와
관세시스템을 환경지향적인 방향으로 조정하는 방안부터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는 에너지 사용에 무거운 세금을 물리면 에너지 절약효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 환경보호를 위한 신기술 개발을 앞당길 수도 있다.

이미 지구의 환경이 더이상 방치할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있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사회주의적 이념은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 민주주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인류 공통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시대착오적인 보호주의나 또다른 형태의
자국이기주의가 침범할 여지를 줄여야 한다.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이야 말로 세계화된 경제권에서
살아가는 모든 세계시민들에게 번영과 안정을 약속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정리=김혜수 기자 dearso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