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맞이하는 신인류를 "호모 시네무스"(영화보는 인간)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영화 가운데 직간접으로 성을 다루지 않는 영화는 얼마나 될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2대본능을 성욕과 공격성으로 단언했다.

따라서 영화의 제1주제로 성을 취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영화는 성표현을 어떻게 취급하고 소화하고 있는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아내의 자살을
막 겪은 중년 남성이 방을 구하다 우연히 만난 20세의 젊은 여성과 파리의
빈 아파트에서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지난 1973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20여년간 수입금지돼오다 지난해, 그것도
군데군데 가위질당한 채 상영됐다.

영화가 개봉되자 영화속의 성 표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바람직하지만 "변태"라는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이를 지켜보는
일반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에 대해서 대중매체들은 약혼자의 아버지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 여주인공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비
시아버지와 예비 며느리가 일으킨 섹스 스캔들이라는 식의 선정주의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처럼 일반적이지 않는 영화속의 성표현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청소년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고유 미풍양속을 지켜내기 위한
것인가.

청소년들에게 해로운 매체에 대해서는 이미 법적 단속근거가 충분하다.

또 개방과 세계화를 강조하는 마당에 유독 성표현만 차단한다해서 미풍
양속이 지켜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볼때 영화 에로티시즘에 대한 과민반응은 사회집단
심리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성에 대한 불안과 갈등에 기인한다.

인간은 은밀한 성적 욕망과 싸우고 때로는 적절히 타협하며 산다.

영화속 성 표현을 까다롭게 규제하자는 사람들은 이런 특성을 외면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 성욕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것이 낯설고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영화 에로티시즘에 대한 히스테리는 우리사회가 은밀한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는 미성숙한 사춘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영화속의 성표현에 건강한 관심을 기울이고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고 공개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때 성문화가 바로 잡힐 것이다.

배종훈 < 오산정신병원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