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전 건설부 차관>

세계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재경경제부에서도 세계공황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러시아 중남미 미국으로 번지고 있다.

동시에 밖에서 보는 우리경제에 대한 전망도 비관적이고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외환위기를 간신히 넘기기는 했지만 실물경제는 살아나기보다 꺼져가고
있고 아직도 위기의 고비는 첩첩산중이다.

국민들은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이 정부는 잘하고 있는 것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쏟아놓은 구호와 정책보따리의 양을 보면
알수 있다.

기획예산위 금감위 재경부는 물론 공정거래위 건교부 노동부 등 저마다
굵직굵직한 대책들을 연일 쏟아놓는다.

금융기관의 개혁에 이어 기업 퇴출 빅딜 공기업구조조정 금리인하
재정적자확대 부동산대책 세제개혁 교육개혁 등등...

장관들의 개인플레이를 보면서 궁금증은 오히려 더해 간다.

이같은 정책들이 과연 방향감각이 있고 서로의 맥이 조화돼 있는 것인지.

경제정책에도 튼튼한 기초가 있고 기둥과 대들보가 있어야 한다.

그 위에 벽이 만들어지고 지붕이 올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불쑥불쑥 나오는 정책에 대한 설명도 없다.

정책과 정책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것 같다.

작년말에 만든 IMF처방은 이미 폐기되었다.

그러면 정부는 경제위기 탈출에 무슨 카드를 갖고 있는 것인가.

최근에 다시 경제정책의 큰 변화가 있었다.

소비를 촉진시켜 경기를 부양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비살리기다.

"아나바다"운동을 펼친 것이 엊그제 아닌가.

그렇다면 돈이 풀리고 인플레가 나타날 것이다.

작년에는 긴축만이 살길이라고 IMF와 다짐을 했었다.

"죽어야 산다"고 했다.

사회 각 부문의 구조조정도 "살기 위해 죽이기"의 일환이었다.

지금 정부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치논리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빅딜이 그렇고, 금융기관의 합병이 그렇다.

또 현대자동차파업의 해결방식도 그런 식이다.

만약 현대자동차사태가 공기업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정치권은 정리해고의
싹을 도려버렸을 것이다.

빅딜을 놓고 벌이는 재계 정계 관계의 힘겨루기를 보면 아직 정책의
방향감각이 없다고 밖에 볼수 없다.

또 있다.

경기가 죽었다고 고소득층의 세금을 저소득층으로 전가하고, 토지공개념은
왜 무너뜨려야 하는가.

참으로 국민들은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개혁과 구조조정및 경기부양은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요즘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경제정책 하나하나가 나름대로는 논리가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의 혼선은 섬뜩할 때가 있다.

어려운 때일수록 당장의 임기응변보다 정확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아쉽다.

물론 한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지금 미래의 처방을 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구조조정과 개혁, 그리고 각종 경제정책의 흐름에는 즉흥적 판단보다
중.장기적인 비전과 맥이 있어야 한다.

이제 단기대책의 혼돈을 넘어서 종합적인 처방을 제시하고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날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앓고 있는 병, 우리가 쓰고 있는 약에 대해 국민과
정부간의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식 처방으로는 더이상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난국이야 말로 정부의 리더십과 역할이 강조되는 때이다.

정부가 나서서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주고, 막힌데를 뚫어주고 밀어주어야
할 때이다.

경제살리기에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할 때이다.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다른 일들은 일단 뒤로 미루자.

정치인의 사정이나 경제청문회로 나라의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이 안타깝다.

경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가 주연이지 방관자가 아니다.

경제는 국민 모두의 몫이다.

국민에게 비전이 담긴 앞날의 큰 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출구가 있고 프로그램이 담겨있고 미래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집권 반년이 지났다.

이제 전정권 탓할 때는 지났다.

새 그림을 내놓아야 할 때이다.

국민들은 다시 뛸 준비가 돼있다.

이 혼돈의 시대를 헤치고.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