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인고의 정치인"이라면 김종필 국무총리내정자(JP)
는 흔히 "풍운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그만큼 그의 정치역정은 영욕과 굴절이 심했다.

JP는 김영삼대통령, 김당선자와 함께 한국 현대정치를 이끌어온 "3김"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김당선자가 대부분의 정치인생을 야당에서 보내면서
"민주화투쟁"에 헌신한 반면 JP는 때로는 여권의 2인자로서 때로는 야당
당수로서 다양한 정치적 변신을 해왔다.

여권의 2인자로서도 부침이 심했다.

사실 JP 만큼 정치적 평가의 진폭이 큰 정치인도 드물다.

쿠데타 장본인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그리고 유신 본당 등.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는 여러 별칭으로 불리며 지난 30여년간 우리
정치의 한중심에 자라잡아 왔다.

그는 35세때인 지난 61년 "5.16 쿠데타"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박정희 전대통령의 집권 18년은 JP에게 있어 순탄한 세월은
아니었다.

당서열 2위인 공화당 의장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최장수 국무총리(4년 7개월)를 거쳤지만 끊임없는 견제와 비리의혹에
시달렸다.

결국 두번이나 "망명아닌 망명" 생활을 했으며 68년에는 "농민복지회 사건"
으로 당의장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69년에는 박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3선 개헌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신반대 데모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에게 "유신 본당"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총리 사임후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JP는 79년 "10.26"이
터지자 공화당총재를 맡았다.

하지만 5공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던 JP는 86년 귀국,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본격적인 야당정치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87년 대선에서는 4위에 그쳤지만 13대 총선에서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
의 국회의원을 확보, 4당체제의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던 그는 90년 3당합당에 참여, 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 여권의 2인자로 복귀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내각제 약속파기와 권력투쟁의 갈등속에서 그는 민자당
에서 탈당하고 자민련을 창당, 6.27 지방선거와 4.11 총선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여야 정권교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난 97년 11월3일 전격적으로
야권후보 단일화에 합의, 김대중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다시 신정부의 2인자로서의 역사의 전면에 자리매김을 했다.

<김태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