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황제 오피스텔로 돌아오자, 이내 그의 고객 명단을 적은 수첩을
꺼내 본다.

새로 구입한 금고에 넣어둔 자기만의 비밀수첩이었다.

그의 고급 금고는 돈을 듬뿍 들인 최신식 최고급의 디자인을 한 최고급의
것이다.

웬만한 화재에는 끄덕도 없고 금은 보석을 컬렉션하면서부터 생긴 자기의
분신같은 사설은행이 매일 그와 같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고 그는 그 금고를
보고만 있어도 흐뭇했다.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누님 같다고 쓸어주고 닦아준다.

그 금고의 크기는 거의 캐비닛을 방불케 하는 것인데 그는 그 속에
값나가는 모든 것을 넣어 둔다.

어느 해의 월요애인이 사준 최고급의 밍크 재킷이 걸려 있고,
이태리제의 1백만원에 가깝다는 머플러며 50만원을 호가하는 셔츠들까지....

물론 한번 입은 옷이나 장신구가 그렇게 둘수록 값이 안 나간다는 것,
한번만 걸치면 그대로 고물이고 중고품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부터 그는
금이나 보석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이 그가 염치 코치 안 가리고 금은 보석으로 컬렉션을 바꾼 큰
이유이며, 그는 마음에 드는 액세서리나 비싼 시계를 끼고 나온 부인에게는
슬쩍 그 것의 값을 알아낸후 능청을 떤다.

"허니, 그 시계 참 멋지네요. 나도 얼마나 준비하면 그런 시계를
살 수가 있지요?"

사뭇 어린아이 같이 순진하게 말하며 그 시계를 탐내는 그에게, 대부분의
나이 든 여자들은 이깟 시계쯤 큰마음 먹고 벗어주기도 하고, 잔뜩 호기를
부리며, "값은 잘 몰라요. 내가 우리 그이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거니까요"
하고 뽐낸다.

어떤때 지영웅은 여사님 몰래 그 시계의 값이 얼마나 가나, 진짜
파텍인가 아닌가, 눈을 부릅뜨고 테스트를 해본다.

그 부인이 화장실을 가거나 시계를 풀어 놓고 방심했을때 그는 그것을
훔친다.

훔치고 시치미를 딱 뗀다.

그러나 정신 좋은 사모님이, "시계 못 봤어요?" 하고 찾으면 기분좋게
화장실에 찾으러 가게 해놓고 침대 밑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시치미를 딱 뗀다.

물론 돈을 잘 쓰거나 오래 사귈 부인에게는 절대로 그런 바보같은 짓을
안한다.

한두번 만나고 집어치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차없이 현금이든
무엇이든 훔친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정사를 갖다가 잃어버린 물건을 결코 신고하거나
귀찮게 구는 법이 없다.

그런 식으로 노획한 값나가는 시계나 반지 귀고리들이 라면박스로
한상자가 더 된다.

그는 훔치는 데에는 아무 죄의식도 안 느낄뿐 아니라, 그로하여 말썽만
없으면 잊어버리고, 그의 사설 금고에 잘 모셔 놓고 가끔 쓸쓸하거나
아플 때는 그것을 꺼내놓고 즐긴다.

"야 임마, 너 다이아몬드 귀고리 오랜만이다. 네가 몇 사이즈나 된다고
했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