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정일 54회 생일을 맞는 평양 권부는 황망할 것이다.

성혜림 여인 탈출소식에 이어 수도 복판에서 사회안전부 하사관이 탈출
유혈극을 벌였으니 정식승계를 앞두고 성대히 치르려던 축제에 재를 뿌린
격이 됐다.

무엇보다 조명길 하사관의 망명 기도가 하룻만에 피살로 종말을 본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가 몇 사람을 사살했다곤 하나 피신과정서 정당방위상 반격은 불가피했을
수 있다.

어려운 대목은 많지만 망명허용이 불가능만은 아니라는 엷은 기대가 너무
쉽게 깨지고 말았다.

탈출동기,총격의 시말 등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신중히 조사되길 바란
기대는 역시 지나쳤다.

그럴 틈도 별로 없이 러측이 북측에 협조, 무장해제를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살을 도운데 대해 못내 아쉬움과 유감을 감추기 힘들다.

이 사건은 해프닝이었지만 그 처리 과정과 귀추는 향후 러시아의 변화방향
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그 점에서 6월 대선 이후 러시아의 행로라든가 한-러 관계를 낙관함은
경계돼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셈이다.

단 며칠 사이 벌어진 일련의 탈북사건은 충격적이다.

몇년에 한번, 몇달에 한번, 몇주 걸러 한번으로 점점 잦아져 온 탈북
귀순이 어느새 요즘엔 하룻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집중하고
있음에 놀란다.

탈북자의 신분변화와 탈출방법의 다양화도 그렇다.

배경이나 자신의 지위, 교육수준, 근무경력등 출신성분의 상승이 매우
급격하다.

무엇보다 김정일이 애지중지하는 장남의 생모라는 한가지 만으로 성여인의
탈출은 김자신외 누가 온대도 신분고하 따지기가 무의미할 정도가 됐다.

방법에 있어도 벌목공 일선병사등 기아선상의 탈출자가 철조망을 뚫는
단순도주형이나 선박 항공기 밀항형에 그치지 않고 특히 외교 공관을 통한
망명시도가 눈에 띄는 추세다.

중요한 것은 그 이면의 북한실상 급변에 대한 설득력있는 분석과 성숙한
대응이다.

귀순 외교관 현성일씨의 새삼스런 지적처럼 북한체제의 버팀목은 체제붕괴
와 운명을 같이할수 밖에 없는 상층부다.

이들은 온갖 특혜를 받기에 외부, 특히 남한의 발전상을 알더라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독재하 누적된 폐단에 경제파탄 홍수피해가 겹쳐 이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똑똑한 그들이 이젠 알아차린 것이다.

이 경사를 만회하는 길은 개방-산업화란 점 역시 알지만 그 양면에 바로
칼날이 있으니 진퇴양난이다.

비록 러시아가 U턴을 한다 해도 이 기로에 선 북한을 구하기엔 자기 코가
석자다.

만일 러시아가 다소 좌회전하면 북한이 힘을 추스리는데 정신적 부축은
될지 모르나 그 이상은 아니다.

대세는 판가름 났다.

그러나 이때 외부,특히 남쪽이 너무 오만 조급해져서 얕보거나 재촉을
해대면 위험하다.

성여인 3국인도를 말하듯, 그럴수록 여유있는 자세로 제도와 재원을 착실히
마련하면서 시대착오 왕국의 일몰에 침착히 대비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