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는 시대와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의 재능이 발휘될때
비로소 탄생한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때를 잘 만나야 대성한다는 말이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왕조 그림의 황금기인 영.정연간에 도화서 화원으로
군왕의 총애를 받으며 활약했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화가였다.

단원은 예술가로서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1745년 김석무의 아들로 태어난 단원은 20대에 이미 화재를 인정받아
대대로 화원을 지낸 외갓집 연줄로 궁정에 들어가 "어용화사"로 자리
잡는다.

1773년 영조의 초상제작에,1781년 1791년에는 정조초상제작에 참여해
종6품관인 안기찬방 연풍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증조부인 김진창이 왜란때 공을 세운 만호였던 탓으로 내려진 음직
이기는 했지만 실은 그만큼 단원의 화재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궁내의 큰 벽을 하얗게 칠해놓고 정조가 "해상군선"을 그리라고 하면
단원이 갓을 벗고 옷은 치켜올린채 붙어서서 잠깐동안에 그려치웠다는
일화는 그의 천재적 재주를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그의 화려했던 화원시대는 45세때 연풍현감이 되면서 일단
끝나버린다.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뛰어나서 속계의 사람같지 않았다"는
신선풍모의 단원은 예술가로서는 뛰어났지만 행정가로서는 낙제점수를
받아 5년만에 현감자리에서 해임된다.

그 뒤부터 단원의 가난한 생활이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3,000냥을 가져왔는데, 진귀한 매화를
사들이는데 2,000냥을 쓰고 800냥으로 술잔치를 벌이고 나니 살림에
쓸 돈이 200냥밖에 남지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할만큼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단원은 매양 가난했다.

또 54세부터는 늘 병고에 시달리면서 농사일로 생업을 삼았다.

70세까지 산듯 하지만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어용화사"로 출세한 단원이지만 그는 초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에 대한 후인의 평도 좋지않다.

단원의 본령은 역시 만년에 이룩한 독특한 필법인 "단원법"으로
우리나라 산천을 그린 사경산수와 서민생업의 이모저모를 해학적으로
담아낸 풍속화, 그리고 도석인물화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단원의 탄신 250주년을 맞아 300여점의 작품을 수집,
19일부터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한국적 회화의 독보적 경지를 개척한 단원의 특별전이 "미술의 해"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도 뜻깊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