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씨 가문 사람들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후비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홀연히 태감 한 사람이 큰 말을 타고 달려왔다.

대부인이 황급히 그를 맞이하며 물었다.

"후비께서 이제 오시나요?"

태감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오후 한시에 점심을 드시고, 두시반에 보령궁에 나가서 불전에 예불을
드리시고, 다섯시에는 대명궁 연회에 참석하시어 등불 구경을 하시고,
그런 후에라야 황제에게 알현하고 떠나 오실수 있을 것입니다"

희봉이 태감의 말을 듣고는 어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적어도 일곱시간은 더 기다리고 있어야 할것 같은데, 그렇다면
노마님과 다른 마님들께서는 일단 방으로 들어가 계시지요.

행차 시간이 가까울 무렵 나오셔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하여 대부인을 비롯하여 나이 많은 부인들은 바깥 일을 희봉에게
맡기고 각기 자기 처소로 들어갔다.

행차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희봉은 하인들에게 지시하여 각곳에
초롱불을 켜 달도록 하였다.

자기 처소로 돌아갔던 마님들도 다시 나와 영국부 대문 앞에 도열해
섰다.

드디어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가씨 가문 사람들과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관리들이 바짝 긴장하며
자세들을 바로 하였다.

말들을 타고 달려온 열명 가량의 태감들이 손뼉을 짝짝 쳤다.

그것은 후비 행차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갑자기 온 주위는 적막에 휩싸였다.

누구 한사람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가사 대감댁 사람들은 서쪽 성문밖까지 나와 후비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자니 저쪽에서 붉은 옷을 입은
태감 두사람이 말을 타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둘은 성문 가까이 오더니 말에서 내려 후비 행차가 다가오는
서쪽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섰다.

계속해서 태감들이 두사람씩 말을 타고 오더니 앞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문 가까이에서 서쪽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섰다.

그런 다음에야 주악소리가 은은히 울리면서 후비 행차의 장엄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을 그린 깃발들, 공작새털로 만든 큼직한 부채들, 꿩깃으로 만든
부채들, 다리가 하나뿐인 상상의 동물을 그린 깃발들이 가득 나부꼈다.

곧이어 향 연기를 뭉실뭉실 피워올리는 금향로가 다가오고 그 금향로를
황금빛 양산이 뒤따랐다.

그 황금빛 양산은 의관을 차려입고 가죽신을 신은 사람들이 받들고
있었는데, 그 양산에는 일곱마리 봉황이 그려져 있고 양산 자루는
구부러져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