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아서 며칠 내로 일을 잘 처리해 주겠어요.

장씨 재판을 맡고 있는 장안 절도사 운대감이 저의 시숙, 그러니까
아까 인사를 나눈 보옥 도령의 아버님과 친분이 있으니 시숙님이
운 대감에게 편지 한 장만 띄우면 만사가 잘 해결될 거예요.

장씨더러 아무 염려 말고 기다리라고 하세요"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정허가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희봉의 잠자리를
살펴본 후 별실을 나갔다.

밤이 깊어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보옥도 지능과 한차례 일을 치르고 슬그머니 진종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진종이 인기척을 느끼고 잠 기운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재미 좋았어?"

보옥은 지능과 어떻게 놀았느냐고 진종이 묻고 있는 줄 알고 처음에는
속으로 뜨끔하였으나 다음 순간 지선과 재미를 보았느냐는 질문이라
여겨져, "그저 그랬어"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너 혹시 바람 맞은 거 아냐? 지선이 보통내기가 아닌것 같던데"

"내가 바람맞을 위인이야? 지선이를 안긴 안았는데 운우지정을 나누는
일에서는 쑥맥이더라구. 하긴 여승 생활하면서 그런거 배울 틈이나
있었겠어?"

보옥이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대꾸하였다.

그러자 진종이 잠기운이 훨씬 덜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그런 걸 배워서 아니? 야, 지능이 그 애는 정말 끝내주더라구.
완전히 색녀야 색녀. 어떻게 그런 애가 여승이 되겠다고 정허 스님
밑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그애 일을 저지르고 말 거야"

벌써 일을 저질렀어. 보옥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종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어쩌면 지능은 금욕이 강요되는 절간 생활에서 욕정이 쌓일 대로
쌓여 있다가 진종과 보옥을 만나 폭발하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진종이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고 보윽은 지능을 안았던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어깨숨을 쉬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천장쯤에서 홀연히 진가경의 얼굴이 나타나 보옥을 덮을
듯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진가경의 얼굴은 보옥을 똑바로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큰 근심과
슬픔에 잠긴 표정이었다.

보옥은 진가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여승과 어울린 사실에 대해
비로소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욕정과 죽음, 죽음과 욕정, 이런 말들이 화두처럼 보옥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