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김수환 추기경이 철거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을 관람하고
감회를 표명하였다 한다.

모든 국민이 비슷한 감회를 느끼고 있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이 되어 있는 총독부건물 철거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데
그 현장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나름대로 이유있는 논리가 부딪쳤었다.

나는 하루 바삐 총독부건물을 철거하자는 편에 서 있었다.

그래서 광복절날 그 뜨거운 기념식 현장에서 감회깊게 첨탑제거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과거 식민역사를 가진 많은 나라들이 과거의 청사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왜 철거하느냐는 야당 지도자의 항변이 있었다.

그러나 따져보자. 일제는 하필이면 우리민족의 정통을 상징하는 왕궁앞을
가로막고 풍수지리상 우리민족의 기가 흐른다는 바로 그 자리에 광화문을
허물고 총독부를 세웠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제국을 상징하도록 "일"자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뿐인가. 전 국토 곳곳에 민족의 정기가 흐른다는 곳에는 모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실로 간교한 짓이었다.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태백산맥을 따라 꽂힌 쇠말뚝을 뽑아내야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왜 우리는 50년간이나 이를 버려두었던가.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다.

서울중학교를 나온 나는 그곳이 조선의 왕기를 짓누르려고 일부러
경희궁을 허물고 일본 젊은이들이 뛰 놀도록 세운 학교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총독부 건물을 그냥 버려둔다는 것은 우리가 일본인들이 버리고간
적산가옥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다.

아직도 우리 사회곳곳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털어내는 것은 바로
민족자존을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이제 광복 50주년을 맞아 우리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길을 터야
할 것이다.

한.일관계에 관한한 우리는 계속 방황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일본을 경원하고 두려워하였다.

지금은 우리가 형 노릇하던 삼국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좀더 당당하게 맞서서 과거를 꾸짖고 배상을 요구할 숫기도
없었다.

우리탓도 있지만 일본의 태도도 항상 진실을 회피해왔다.

이것은 곧 일본의 불행이었고,이웃해 있는 우리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한.일관계는 항상 미진한 미완성상태였다.

영국에서 발행하는 근착 "더 이코노미스트"는 사과할줄 모르는 일본의
국수주의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일본은 전쟁피해국에 사과를
거부하고 오히려 과거의 향수에 빠져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서양사람들의 눈에도 일본은 2중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지금 전쟁에 진 것을 아쉬워하고 원자탄의 피해자가 된
것을 억울해 하고 있다.

그들이 반성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쟁에 진 것이라는
해괴한 말이 공공연히 일본 국회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같은 소아병적 역사왜곡이 몇몇 소수 극우파의 견해로 알았는데,요즘의
"전쟁사과반대"청원사태를 보면 일본의 보편적인 국민감정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본다.

해괴한 짓이다.

천황만세를 부르면서 할복자살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 한사람으로
일본의 국수주의는 막을 내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가끔씩 뱉어내는 "망언시리즈"는 그들의 숨겨진 속살인 것이다.

독일에도 신나치즘의 기운이 있지만 그것은 극히 작은 사회의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대학교수나 국회의원등 사회지도층까지 가세한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규모라는 것이 다르다.

오히려 지식인을 자처하는 인사들이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당사국들이 요구하는 전쟁 사과라는 것이 패전국이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로 착각한다면 오산이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비롯한 수많은,그리고 긴 고통의 흔적이
역사책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짓밟힌 민족자존심은 물론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농지수탈 징용 정신대
등으로 인한 통한의 페이지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것을 어루만져주고 청산하지 않고는 일본과 함께 동행할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지금 경제대국이 되어서 패전국의 상처도 잊고 가해자로서의
과거도 함께 잊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수백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이 보냈던 어두운 시절의 기록은 간디의 투쟁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식민지 시절의 설움을 잊고 영국 여왕을 중심으로
한 영연방의 일원이 되어 있다.

생각해 보라. 동남아 지역에서 일본의 압제에 시달린 나라들이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연방체를 만들자면 과연 어느 나라가 선뜻 나설 것인가.

여기에서 바로 일본과 다른 나라와의 차이를 본다.

종전 50년.일본은 패전국에서 지금은 제1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미국의 은총 탓이라 미국에만은 "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식민지로 거느렸던 다른 나라에는 오히려 오만하고
당당하다.

일본은 영원히 피해갈수 있을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총독부 첨탑을 제거한 이 시점에서 한.일관계에 있어 "역사 바로잡기"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세계적으로 지금 전쟁세대가 쥐고 있던 사회의 이니셔티브가 점차
전후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은 이미 전후세대가 대통령이 되었고 일본국회에도 전후세대가
대거 진출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세대교체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그런데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역사책을 다음 세대로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