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이름만 대면 금방 알만한 통화금융당국의 높은 분이 며칠전 집에
들어갔더니 부인이 이렇게 묻더란다.

한쪽에선 사건.사고가 꼬리를 물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세계화 소리가
요란하니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근자에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다.

조선조말기 "삼정의 문란시대"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든다.

삼정은 당시 국가재정의 지렛대역할을 했던 전정 군정 환곡.

이들 3대세제가 관료들의 축재수단으로 전락해 민심이 들끓었던 것을
가리켜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는데 요즘 상황이 그때와 꼭 닮아 있다는
것이다.

"신삼정의 문란"이라고나 할까.

우선 도세행각부터 보자.인천북구청 세금횡령사건에 이어 이번엔 또
부천이라고 한다.

11개 지방관청을 감사한 결과 9개청에서 세금도둑질을 적발했다고 하니
"도세의 전국화"로 불러도 무방할듯 하다.

부천에서 45만장의 세금영수증을 불태워 없애버린 전례에 비추어
이러다간 방방곡곡에서 영수증 태우는 연기가 솟아 오를지도 모른다.

도세는 지방관료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정의 비리와 비교해도 하등 "손색"이 없다.

버려진 황폐한 토지에 세금을 매기거나(백지집세),사적으로 횡령한
공금을 벌충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었던(도결) 전정의 폐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군정도 비슷하다.

연이어 터지고 있는 군기강 문란사건은 접어두더라도 돈만 있으면
병역기피는 "식은 죽 먹기"다.

병무청 국정감사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서울 압구정동 서초동등지에 거주하는 부유층과 사회저명인사 자제들의
방위병 판정비율은 전국평균(27%)보다 훨씬 높은 43%나 된다.

병무 부조리 의혹자들을 대상으로 한 특검단의 정밀 신체검사결과도
마찬가지다.

방위병판정을 받았던 25명중 68%인 17명이 현역해당자로 드러났다.

이게 신군정의 실태다.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가게 하고 죽은 사람(백골집포)이나,
어린아이들을 젊은이로 꾸며(황구첨정) 군포 한 필씩을 군납세로 받던
구군정과 비교하면 역시 "그게 그거"라고 할수 있다.

다음은 환곡.국가가 세금으로 납부받아 국고에 넣어 두었던 곡식을
이듬해 춘궁기에 백성에게 꾸어줬다가 추수기에 환수받는게 환곡이었다.

그런데 당시 부패한 관료들은 이 장리벼 제도만으론 잇속을 챙기는게
모자라 속임수까지 썼다.

다섯 가마를 꿔주곤 열 가마를 빌려줬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춘궁기가 없어진 오늘날도 이같은 환곡행정은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통신주식의 입찰행정이다.

지난번엔 국민의 재산을 파는 업무를 대행하던 은행이 이 주식의 낙찰가
를 조작하더니 이번엔 한 장에 3만1,000원(예정가)인 주식을 4만7,100원
(최저 낙찰가)에 팔았다.

이런 속임수와 투기부채질이 현대판 환곡의 문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와중에 웬 뚱딴지같이 "세계화"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세계화야 물론 대통령이 앞장서 주창하지 않더라도 게을리할 수 없는
국정목표임에는 틀림없다.

상품과 자본,정보와 지식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상황에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깨진 쪽박으로 어떻게 "세계"를 담을수 있단 말인가.

부처마다 "세계화소동"을 벌이고 있다지만 고작해야 지난해 만들어놓은
200쪽이 넘는 "국제화전략"에서 국제화란 단어만 쏙 빼내 세계화로 바꾸고,
또 하나의 거창한 이름의 위원회를 만들거나,아니면 신경제추진회의를
세계화추진회의로 둔갑시키는 선에서 끝낼게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세계화를 위해선 요란한 구호보다는 그 기반을 다지는 일이
먼저일게다.

그것은 신삼정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서 출발해야 하고 그러자면 적임자를
골라 쓰는게 중요하다.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던 때 다산 정약용선생은 "타관 가구,목민지관
불가구야"(목민심서 제1편 제1조1항)라고 했다.

임금을 대신해서 정사를 보는 고을의 원님(목민지관)은 미관말직과는
달리 아무나 될수도 없고,따라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앉혀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때마침 대통령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세계화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연말께 당정구도를 새로 짤 것이라고 한다.

오늘의 행정조직편제상 딱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은 이번
인사야말로 "목민지관 불가구"를 바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