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90)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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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친은 경기고전신인 경성고보를 졸업한뒤 한때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대구에서 가게를 하기도 했으며 그후 북경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기셨는데 일찍 별세하셨다.
나는 아버지와의 정을 별로 주고받지 못했고 주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박채현으로 금천공립국민학교를 건립하셨고 초대교장을
지내셨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신 마을유지였으며 그당시 일본인 도지사 군수가
마을에 오면 우리집 사랑방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가도록 되어있었다.
청도군내에서는 그 연세에 일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라는
것이 관가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금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뒤 대구에
있는 실습학원에서 1년간 재수한끝에 대구상고에 입학했다.
농림학교에 낙방한것이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하고있다.
당시 대구상고는 일본학생이 반이고 한국학생이 반이라 입학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정평이 나있었다.
지금도 일본인 동기동창들이 가끔 찾아오고 합동동창회를 일본에서 하자는
초청을 받기도한다.
대구상고3학년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북경으로 가신뒤 양식은
할아버지께서 시골에서 가져다 주시고 나와 어머님은 셋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머님이 등록금을 조달하느라 고생하시던 일을 생각하면 어머님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한게 더욱 가슴아프다.
대구상고를 졸업할때 담임인 아옥선생님이 나를 한은전신인 당시의
조선은행에 추천해 주겠으니 구두시험을 잘치러야 한다고 했다.
아옥선생이 나를 조선은행에 취직시켜준것은 나의 인생에 큰 갈림길이었다.
나는 한국은행총재가된 다음해인 1987년 오사카 ADB총회에 참석한뒤
산구현시골에 사시는 은사를 방문했었다.
그때 아옥선생은 88세의 고령으로 부인이 돌아가신후 적적해서 병이 나
노인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내손을 잡고 반가워 눈물을 훌리던 스승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은 "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한 자네가 어떻게
한국은행총재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선생님이 취직시켜주신 조선은행 행원으로 들어가 선생님이
가르치신대로 성실하게 일을해서 계단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밟고 올라가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오마에 에라이조"(너는
훌륭하다)라고 옛날대로 칭찬해 주셨다. 그후 회복되어 아들집에서 살다가
2년후에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아옥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대구상고 동기동창으로는 송정범 경제기획원차관(도로공사사장역임)
이찬섭(농업은행이사역임)과 금명윤(통일민주당 당대표대행,현민자당고문)
등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송군은 일본 대분고상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행했고 이군은
서울상고(현서울대 상대전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대구상고
동기동창 셋이 같이 중앙은행에 재직했으나 송군과 이군은 나보다 먼저
승진했다.
나는 이들보다 먼저 입행했으나 학벌이 상고출신이라 5년후에 대리가 되어
늘 동기동창이면서 송군과는 조사부에서, 이군과는 자금과에서 같이
근무하며 상사로 결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내가 자기 아랫사람이라고 스트레스를 주지않고 늘
도와주어 셋이 한 직장에서 동기동창으로서의 우정이 계속됐다.
잡다가 대구에서 가게를 하기도 했으며 그후 북경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기셨는데 일찍 별세하셨다.
나는 아버지와의 정을 별로 주고받지 못했고 주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박채현으로 금천공립국민학교를 건립하셨고 초대교장을
지내셨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신 마을유지였으며 그당시 일본인 도지사 군수가
마을에 오면 우리집 사랑방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가도록 되어있었다.
청도군내에서는 그 연세에 일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라는
것이 관가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금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뒤 대구에
있는 실습학원에서 1년간 재수한끝에 대구상고에 입학했다.
농림학교에 낙방한것이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하고있다.
당시 대구상고는 일본학생이 반이고 한국학생이 반이라 입학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정평이 나있었다.
지금도 일본인 동기동창들이 가끔 찾아오고 합동동창회를 일본에서 하자는
초청을 받기도한다.
대구상고3학년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북경으로 가신뒤 양식은
할아버지께서 시골에서 가져다 주시고 나와 어머님은 셋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머님이 등록금을 조달하느라 고생하시던 일을 생각하면 어머님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한게 더욱 가슴아프다.
대구상고를 졸업할때 담임인 아옥선생님이 나를 한은전신인 당시의
조선은행에 추천해 주겠으니 구두시험을 잘치러야 한다고 했다.
아옥선생이 나를 조선은행에 취직시켜준것은 나의 인생에 큰 갈림길이었다.
나는 한국은행총재가된 다음해인 1987년 오사카 ADB총회에 참석한뒤
산구현시골에 사시는 은사를 방문했었다.
그때 아옥선생은 88세의 고령으로 부인이 돌아가신후 적적해서 병이 나
노인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내손을 잡고 반가워 눈물을 훌리던 스승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은 "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한 자네가 어떻게
한국은행총재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선생님이 취직시켜주신 조선은행 행원으로 들어가 선생님이
가르치신대로 성실하게 일을해서 계단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밟고 올라가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오마에 에라이조"(너는
훌륭하다)라고 옛날대로 칭찬해 주셨다. 그후 회복되어 아들집에서 살다가
2년후에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아옥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대구상고 동기동창으로는 송정범 경제기획원차관(도로공사사장역임)
이찬섭(농업은행이사역임)과 금명윤(통일민주당 당대표대행,현민자당고문)
등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송군은 일본 대분고상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행했고 이군은
서울상고(현서울대 상대전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대구상고
동기동창 셋이 같이 중앙은행에 재직했으나 송군과 이군은 나보다 먼저
승진했다.
나는 이들보다 먼저 입행했으나 학벌이 상고출신이라 5년후에 대리가 되어
늘 동기동창이면서 송군과는 조사부에서, 이군과는 자금과에서 같이
근무하며 상사로 결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내가 자기 아랫사람이라고 스트레스를 주지않고 늘
도와주어 셋이 한 직장에서 동기동창으로서의 우정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