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방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세조는 술(주)에도 남달리 강했던 모양이다.
그는 종친이나 공신들을 불러모아 공식.비공식의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참석한 공신들의 취중언행을 면밀하게 살펴가면서
자신에 대한 충성의 도를 재어보곤 했다. 그는 술이란 것이 사람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게 하는데 무엇보다 좋은 영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금앞에서 대취해 춤까지 추는 질탕한 이 연회에서는 자연히 실언하는
공신들이 하나 둘씩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인직는 취중실언의
명수로 지목돼 있었다.

타고난 자질이 호걸스럽고 영매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했다는
정인지는 성격면에서 세조와 비슷했던지 술만마시면 대취해 두사람이
유교와 불교의 시비를 논하다가 실언을 하기 일쑤였다.

정인지가 영의정으로 있던 세조4년(1458)2월12일,경복궁 사정전에서는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중삭연이 걸직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취한
정인지는 임금이 불경을 간행하는 것을 옳지못한 일이라고 공박하면서
"부처를 좋아하니 나라를 하루라도 보전할수 있겠느냐""연일 버티고 내게
지지않으려 한다"는등 임금앞에서 해서는 안될 무례한 말들을 서슴지않고
내뱉았다. 그다음날 세조가 "어제 취중에 나를 욕보임은 무슨
연고인고"하고 물었을때 그의 대답은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세조는 정인지의 고신(직첩)을 거두고 그를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루가지난뒤 풀어주었고 뒤이어 작위까지 올려
하동부원군으로 삼았다.

그해 가을 경회루에서 양노연이 열렸을때 또 취해버린 그는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방자한 실언을 하고 만다. 세조를 "너"라고 부르면서
"그같이 하는 것은 내가 모두 취하지 않겠다"고 떠벌였다. 여기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정인지의 취중실언은 다음해인 1459년 여름에 다시 한번
자행된다. 상세한 내용은 기록돼 있지 않지만 세조가 그를 내전에
불러들여 술자리를 베풀자 또다시 대취해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가
실언을 할때마다 대신들은 아무리 공신이지만 목을 베어야 한다고 벌떼처럼
나댔다.

그때마다 세조는 이렇게 말하며 정인지를 싸고 돌았다.

"정인지는 명예를 구하고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데 지나지 않는
사람이다" "정인지가 한 말은 모두 옛정을 잊지 못해서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다" "정인지의 무례한 짓은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매양 술에 크게 취하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책망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번이나 연거푸 실언을 하자 세조는 정인지를 불러들여
대신들앞에서 엄하게 책망하고는 다시 그의 고신을 거두고 부여에
안치시키도록 (외방종사)했다. 그뒤에도 정인지를 공신적에서 삭제하고
중죄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잇달자 세조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취중에 한 일은 논할 것이 못된다. 다시 말하지 말라"
두달이 지난뒤 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여에 외방종사됐던
정인지를 소환,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했다. 반대의견이 거세지자 전일에
정인지에게 죄를 준것은 자신의 과실이라면서 묵살해 버렸다.

흥미 있는 일은 정인지의 취중실언을 그처럼 극성스럽게 논죄했던 우의정
강맹경도 술자리의 실언으로 한차례 파직을 당했다가 복직됐고 좌의정
정창손도 술자리에서 "진실로 마땅합니다"만 되뇌이다가 파직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창손의 실언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다시 정인지가 정창손을 논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니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여기서도 실감할수
있다.

세조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10년이나 더 살다가
1478년(성종9년) 83세로 죽은 정인지는 여섯왕을 한결같이 섬겼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너무 오래 영화를 누리고 살았던 탓인지 말년에는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논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신은 정인지가 죽자 길게 그의 공적을 늘어놓고는
말미에 이렇게 짤막한 논평을 덧붙여 적었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수만석이 되었다. 그래도 전원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의 것까지 많이 점유 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 하였다"
이 사신이 요즘 세태를 기록한다면 어떻게 써 놓을지 궁금해 진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