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오른쪽)이 28일 서울 마곡동 코오롱 원앤온리타워에서 회사를 떠나겠다고 발표한 뒤 임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코오롱그룹 제공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오른쪽)이 28일 서울 마곡동 코오롱 원앤온리타워에서 회사를 떠나겠다고 발표한 뒤 임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코오롱그룹 제공
28일 오전 서울 마곡동 코오롱 원앤온리타워. 임직원 200여 명이 참석한 ‘성공퍼즐세션’ 행사가 끝나갈 무렵 청바지와 검은 터틀넥 스웨터 차림의 이웅열 회장이 예고 없이 연단에 올랐다. 이 회장은 “오늘 내 옷차림이 색다르죠? 지금부터 제 말을 들으면 왜 이렇게 입고 왔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라고 말문을 연 뒤 손수 준비한 편지를 읽어내렸다. “2019년 1월1일자로 코오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대표이사 및 이사직도 그만두겠습니다.” 그룹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퇴 발표에 행사장 곳곳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룹 발전 위해 사퇴 ‘초강수’

편지를 9분가량 낭독하며 퇴임의 변을 밝힌 그는 “사람들은 저를 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껴야 했다”며 “금수저를 꽉 물고 있느라 이에 금이 간 듯하다”고 털어놨다. 선친의 뒤를 이어 코오롱그룹을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우는 동안 막중한 부담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임직원들을 언급할 때는 수차례 눈물을 훔치고 목이 멘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재계에선 이 회장의 퇴임 발표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룹 내에서도 이 회장의 사임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코오롱 창업주인 고(故) 이원만 회장의 손자이자 고 이동찬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1985년 (주)코오롱에 입사해 1996년 40세에 그룹 총수가 됐다. 그는 회장 취임 이후 1997년 외환위기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파고 속에서 첨단소재, 바이오, 건설, 패션, 유통 등 사업을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때를 놓치면 기회가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시불가실(時不可失)’을 언급하며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 우물쭈물하다 더 늦어질까 두렵다”고 했다. 이 회장이 ‘때’를 언급한 이유는 경영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어서다. 그는 “그동안 코오롱호(號)의 운전대를 잡고 앞장서 달려왔지만 시야는 흐려져 있고 가속 페달을 밟는 발엔 힘이 점점 빠진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룹의 혁신과 성장을 위해 본인 퇴진이라는 초강수를 던진 것이다.

“새 일터에서 성공의 단맛 볼 것”

이 회장은 이날 “1996년 1월 마흔에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딱 20년만 코오롱을 이끌고 예순이 되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고 작정했다”고 밝혔다. 코오롱그룹 관계자는 “이 회장이 여전히 지주사의 대주주 지위에 있지만 다시 경영에 복귀할 가능성은 낮다”며 “선친인 이동찬 회장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새로 창업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새 일터에서 성공의 단맛을 맛볼 준비가 돼 있으며 마음대로 안 돼도 상관없는 망할 권리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이 향후 어떤 분야에서 창업 활동을 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평소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아 사회적 기업에서 활동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계열사 중 벤처투자기업인 코오롱인베스트먼트가 있는 만큼 유망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발굴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그룹 협의체 ‘원앤온리위원회’ 가동

이 회장의 퇴임으로 코오롱그룹은 이날 지주사 중심 경영을 골자로 하는 2019년도 정기인사를 했다. 내년부터 주요 계열사 사장단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 성격의 ‘원앤온리위원회’를 가동한다.

유석진 사장·이규호 전무
유석진 사장·이규호 전무
이에 맞춰 유석진 (주)코오롱 대표이사(부사장)가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원앤온리위원장을 겸임한다.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에서는 캐주얼 브랜드 본부장을 맡았던 한경애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는 등 여성 임원 4명이 한꺼번에 승진하는 파격 인사가 이뤄졌다. 이수진 (주)코오롱 경영관리실 부장이 상무보로 발탁돼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재무분야 여성 임원이 됐다.

그룹 3세 경영인이던 이 회장이 물러나면서 향후 승계구도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 회장의 아들 이규호 (주)코오롱 전략기획담당 상무(35)는 전무로 승진해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임명됐다. 그룹의 주력 사업 중 하나인 패션 사업 부문을 총괄 운영한다. 재계에선 이 회장이 아들에게 바로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고 경험을 더 쌓게 하기 위해 내린 결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

1956년 서울 출생 1975년 신일고 졸업 1977년 고려대 경영학과 수료 1983년 미국 아메리카대 졸업 1985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 석사 1985년 (주)코오롱 뉴욕지사 이사 1987년 (주)코오롱 상무이사 1989년 코오롱그룹 기획조정실장(전무) 1991년 코오롱그룹 부회장 1994년 (주)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1996년~ 코오롱그룹 회장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