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의암(義菴) 손병희는 1861년 충북 청원에서 향리의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를 홀대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2년 동학(東學)에 귀의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남접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공동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실패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됐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처형되자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3대 교주가 됐다. 1901년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고,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쓰며 활동했다. 일본에서 망명 중인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1905년 그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동학 내부에서 활동하던 일진회의 친일 인사들을 출교시켰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교세 확충에 전력을 다했다.

민족 교육 활동에도 앞장섰다. 1909년 동덕여학교를 시작으로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 보성소학교 등을 인수해 교육에 힘썼다.

그는 천도교 대표로서 1919년 3월1일 한용운, 최린, 이승훈 등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돼 서울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년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19일 별세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