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을 닮은 빌라노프 궁전.
베르사유 궁을 닮은 빌라노프 궁전.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는 녹턴(Nocturn)이 흐르고 있다. 폴란드와의 첫 만남은 감미로운 선율이 먼저 다가온다. 폴란드의 관문인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국제공항은 음악가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공항일 것이다. ‘쇼팽이 사랑한 조국, 쇼팽을 사랑하는 폴란드’로 들어간다. 폴란드 초겨울 여행의 시작은 쇼팽의 추억을 따라 바르샤바의 올드 타운에서 시작됐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전’으로 폴란드를 떠올린다면 구세대로 오해를 받는다. 유럽 대평원의 한가운데 넓은 국토를 보유한 폴란드는 우리와 닮은 것이 너무 많은 나라, 우리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깊은 여행지다.
베르사유 궁을 닮은 빌라노프 궁전.
베르사유 궁을 닮은 빌라노프 궁전.
끈질긴 항전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

폴란드는 한국보다 3배 정도 큰 면적을 갖고 있는 동유럽 국가다. 인구는 약 3800만 명으로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많고, 인종은 대다수가 슬라브족이며 폴란드어를 사용한다. 나라를 건국한 10세기경부터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여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국가다.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찾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 출신이다. 독일과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늘 주도권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 놓여 있었다. 19세기에는 123년간 삼국 분할에 의해 지도상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끈질긴 항전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다.

만두와 비슷한 피에로기.
만두와 비슷한 피에로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 국토가 전쟁터가 돼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후에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해 자유와 독립이 억압을 받았다. 한편으로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낸 국가이기도 하다. 쓰라린 역사와 이를 이겨낸 극복의 과정이 우리와 너무 흡사하다. 승리와 영광의 유적보다 도전과 극복의 상징이 많았던 이유 때문이었을까? 바르샤바를 걷다 보면 문득문득 뭉클함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폴란드의 현재는 역동적이다. 한국보다 먼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동유럽 최대의 영토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국가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대표 도시는 수도인 바르샤바와 고도인 크라쿠프다. 1000년을 이어온 역사에서 전반의 500년은 크라쿠프가, 후반의 500년은 바르샤바가 서울이었다.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이루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발원해 발트해로 흐르는 비스와 강을 따라 두 도시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폴란드 여행의 축이다.

쇼팽의 무덤이 두 개인 이유는

바르샤바는 발트해에서 내륙으로 거슬러 오르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 발트해에는 아름다운 인어 자매가 살았다고 한다. 바다 생활에 싫증난 두 자매는 바다를 떠나 각기 육지로 올라간다. 한 인어가 대서양 방향으로 가서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올라갔고, 다른 인어는 남쪽 방향의 비스와 강으로 갔다고 한다. 비스와 강을 오르던 인어는 강가의 어부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해 자손을 이뤘다고 한다. 그때 어부의 이름이 ‘바르스’였고, 인어의 이름이 ‘사바’여서 부부가 살던 강가의 이름이 ‘바르샤바’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폴란드 여인들이 미인인 이유는 아름다운 인어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펜하겐처럼 바르샤바의 상징도 인어다. 올드 타운과 비스와 강가에 가면 바르샤바의 수호상인 인어상이 있다. 여성스러운 코펜하겐의 인어 동상과 달리 바르샤바의 인어 동상은 칼과 방패를 들고 있다. 호전적 모습이 의아하지만, 인어의 후손이었던 폴란드의 고단한 역사가 동상에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여행 안내 센터에서는 바르샤바 쇼팽 투어를 추천했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바르샤바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만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쇼팽은 폴란드가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삼국 분할로 지도에서 사라졌던 1810년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음악 신동으로 바르샤바에서 보내고, 청년이 돼 뛰어난 천재성으로 연주 무대를 파리로 옮긴다. 폴란드의 어지러운 정세는 그의 귀국을 끝내 막는다.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1849년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그의 생애에 걸쳐 폴란드라는 나라는 없었다. 쇼팽은 파리의 페르라세즈 공원에 묻히지만, 유언에 따라 그의 뜨거운 심장만은 바르샤바로 돌아와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된다. 쇼팽의 무덤이 두 개인 슬픈 이유다. 쇼팽이 거닐던 올드 타운 광장과 왕궁이 있던 잠코비 광장, 잠깐의 학창 시절을 보낸 바르샤바대학, 연주를 하던 라지비우 궁전과 국립 오페라 극장의 곳곳에 그의 체취가 서려 있다. 거리마다 설치된 ‘쇼팽 벤치’는 앉을 때마다 그의 연주곡을 들려준다.

바르샤바의 올드 타운에서 쇼팽 벤치에 앉아 그의 연주곡 ‘에튀드(Etudes)’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폴란드 여행자의 제일 커다란 특권이다. 바르샤바는 재건의 도시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바르샤바는 도시의 80% 이상이 파괴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올드 타운도 전후에 남겨진 그림과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다. 파괴된 도시를 새로 세우기보다 복원을 선택한 그들의 결정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기억이 남은 바르샤바

피우수트스키 광장의 엄숙한 십자가와 성 십자가 성당의 경건함을 눈에 담고 걷다 보니 비스와 강에 노을이 진다. 블루와 레드가 뒤엉킨 노을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반영 같다. 강 건너의 신도시는 마치 폴란드의 시원한 미래처럼 올드 타운의 뭉클함을 걷어간다. 베르사유 궁을 닮은 아름다운 빌라노프 궁전, 히틀러가 녹여버린 쇼팽 동상을 국민의 성금으로 다시 세운 와지엔키 공원, 무명 용사의 불꽃이 타오르는 사스키 공원도 바르샤바 여행에서 빼놓으면 서운한 장소들이다.

코페르니쿠스와 퀴리부인도 폴란드의 영광이다. 노벨문학상을 4명이나 배출한 폴란드의 저력은 올드 타운을 잠시만 둘러봐도 느낄 수가 있다. 바르샤바는 인어처럼 아름답고 강하다.

바르샤바의 또 다른 쓰라린 기억은 유대인이다. 폴란드 출신 영화감독인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피아니스트’의 무대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주 지역이다. 스페인처럼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폴란드였지만 역사적으로 유대인에겐 포용적이었다. 폴란드에는 2차 세계대전 전에 약 35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고 한다. 그중 바르샤바에는 도시 인구의 30%인 33만 명이 거주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이주한 도시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나치는 홀로코스트(대학살)라는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3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다. 폴란드인 희생자 200만 명을 넘어서는 숫자다. 나머지도 나치를 피해 국외로 탈출해 전후에는 겨우 10만 명의 유대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 깊은 상흔이 폴란드에서 벌어졌고 아픈 기억의 중심이 바르샤바였다.

영화의 포스터에 나오는 폐허 속의 바르샤바는 전쟁의 막바지에 일어난 이 사건 때문이다. ‘바르샤바 민중 봉기’다. 올드 타운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어린 소년병의 동상이 서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4년 여름에 벌어진 바르샤바 무장 봉기는 63일간 20만 명이 전사하고 올드 타운이 모두 처참하게 파괴되는 참화였다. 고립된 두 달 동안 소년을 포함한 바르샤바 시민들이 독일군의 포위 공격으로 죽어간다. 전령병으로 참전한 동상의 소년 이름은 ‘루비츠’다.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동상.
와지엔키 공원의 쇼팽동상.
소년병 동상 또래의 아이가 아빠의 손을 잡고 동상에 다가간다. 아이의 키만큼 큰 소총에는 화이트와 레드의 폴란드 국기가 달려 있다. 동상을 바라보는 이방인도, 소년병의 후손인 아이도 먹먹함에 숙연해진다. 바르샤바 여행의 마무리는 중앙역 인근의 ‘문화과학궁전’이다. 어둠이 짙게 배이고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냉전이 절정이던 시절 스탈린이 선물로 지어준 이 뜬금없는 건물은 아이러니하게 바르샤바에서 제일 높다. 반갑지 않은 건물이 주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바르샤바는 노을을 머금은 북반구의 아름다운 가을 풍광이다.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이겨낸 바르샤바처럼 불굴의 의지가 묻은 짙은 갈색이다.

중세에서 시간이 멈춘 크라쿠프

크라쿠프는 바르샤바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30분을 내려간다. 용의 전설이 깃든 도시고, 타타르의 침략이 담긴 상처의 도시고, 독일군 주둔 사령부가 있던 스토리의 도시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배출한 신앙의 도시다. 크라쿠프는 중세의 풍광을 그대로 품고 있다. 19세기 이후 신축한 건물이 없다는 올드 타운과 폴란드 국왕의 대관식이 열렸던 바벨성은 여행의 중심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촬영장이던 유대인 거주지 ‘카지미에슈’처럼 흑백 영화 같은 아픔을 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크라쿠프는 1138년 수도로 정해져 바르샤바로 천도할 때까지 558년간 폴란드의 중심이었다. 2차 대전의 전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고 보전된 도시라고 한다. 바르샤바가 재건의 도시라면 크라쿠프는 보전의 도시다. 중세의 시간을 거니는 즐거움이 있는 폴란드의 인기 여행지다.
빌라노프 궁전을 세운 얀 소비에스키 3세의 무덤.
빌라노프 궁전을 세운 얀 소비에스키 3세의 무덤.
크라쿠프역을 나서면 올드 타운이 시작되는 말발굽 형태의 ‘바르바칸’과 ‘플로리안스카’ 문이 여행자를 반긴다. 크라쿠프 방문자가 통과 의례를 치르는 길목이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고 칭한 성벽의 노천 미술관을 지나면 ‘왕의 길’이라는 ‘플로리안스카 길’과 ‘그로드즈카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유럽에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크다는 ‘중앙시장 광장’이 펼쳐진다.
크라쿠프 바벨성 안의 대성당.
크라쿠프 바벨성 안의 대성당.
몽골이 전 세계를 휩쓸 때 타타르족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크라쿠프의 성마리아 성당 첨탑에서 망을 보던 나팔수가 적의 침입을 알리는 나팔을 분다. 그러나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적의 화살에 나팔수가 전사한다. 그 비운의 나팔수가 부르던 곡이 짧은 성가인 ‘헤이나우’다. 지금도 나팔 불던 병사를 기리는 ‘헤이나우’를 시간마다 분다. 죽은 병사가 부르던 부분까지만 분다. 짧은 나팔 소리가 광장에 울리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 ‘헤이나우’는 성모의 새벽이란 곡으로 폴란드 국가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에게 ‘아리랑’ 같은 느낌일 것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직물 회관과 구시청사 탑이 위세 높게 자리 잡고 있다. 크라쿠프 여행자의 이정표이자 쇼핑과 먹거리의 중심이다. 광장을 중앙에 두고 코페르니쿠스가 다닌 야기엘론스키대학과 12사도가 안내하는 성 바울과 베드로 성당이 운치를 더한다.

폴란드 영광의 기억이 남아 있는 바벨성

‘왕의 길’ 끝에는 크라쿠프 여행의 완결지인 바벨성이 있다. 바벨성에서 내려다보는 비스와 강의 석양은 순백의 드레스 입은 신부처럼 눈이 부신다. 바벨성은 크라쿠프가 수도이던 시절의 왕궁이었다. 성루에 서면 크라쿠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청동 첨탑과 금색 성당돔, 주황색의 왕궁은 폴란드의 화려했던 영광의 시절을 보여주는 듯 늠름하면서 매혹적이다. 폴란드 국왕들의 대관식과 장례식은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크라쿠프의 성마리아 성당·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의 야경
크라쿠프의 성마리아 성당·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의 야경
크라쿠프 대성당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되기 전에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추기경으로 10여 년을 재직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교황으로 종교를 떠나 세계와의 소통에 앞장섰으며,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으로 조국 폴란드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 바벨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 지역인 ‘카지미에슈’가 있다. 유대인 회당인 ‘시나고그’와 유대인 광장이 있다. 전쟁으로 사라져간 많은 유대인이 지나던 요제파 거리엔 아직도 숙연함이 흐르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독일어 아우슈비츠(Auschwitz)로 더 유명한 ‘오슈비엥침’은 크라쿠프 근교에 있다. 죽음의 수용소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이송 집결지가 크라쿠프의 ‘카지미에슈’였다고 한다. 보하테로우 게타 광장에는 주인 없는 의자 조형물이 나열돼 있다. 침묵의 광장에 서면 먹먹한 슬픔이 전해진다.

폴란드에는 우리의 족발과 만두를 닮은 골롱카와 피에로기가 있다. 사람들도 어딘지 모르게 우리 모습과 친근하다. 어쩌면 우리와 혈연적으로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바르샤바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있다. 한국외국어대에도 폴란드어과가 있다. ‘세계경영’을 모토로 했던 우리 기업의 첫 해외 진출이 폴란드 국영 자동차였다.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나라가 폴란드였다.

폴란드 여행은 흑백 사진을 유쾌한 컬러 사진으로 바꿔주는 것 같다. 뭉클함에 대한 기억이 가득하지만 오래도록 지켜온 굳건한 자존심이 더욱 빛났다. 문학과 예술은 도시의 거리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웠고 친절했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는 비스와 강의 노을처럼 감미로웠다.

여행정보

폴란드 항공(LOT)이 직항으로 주 5회 바르샤바와 서울을 운항한다. 핀란드의 헬싱키나 체코 프라하를 스톱오버(경유)하는 항공편도 많다. 폴란드는 철도가 잘 발달돼 있어 크라쿠프나 그단스크 등으로 이동하기 수월하다. 화폐 단위는 즈워티(ZT)다. 1즈워티는 304원42전. 물가는 상대적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에 비해 싼 편이다.

치안 상태는 양호해 여행하기 무리가 없고, 계절적으로 6~9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주요 여행지는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그단스크, 자코파네 등이 있다.

바르샤바=글·사진 이문성 여행작가 dhcjs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