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군' 이정재 "가장 큰 적은 왜군 아닌 오싹한 두려움이었죠"
오랜 기간 ‘꽃미남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배우 이정재는 ‘도둑들’(2012)의 사기꾼 뽀빠이 역을 계기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났다. 사극으로는 ‘관상’(2013)에서 수양대군 역으로 잔인한 야심가를 연기한 후 4년 만에 ‘대립군’(오는 31일 개봉)에서 임진왜란 당시 대립군의 수장 토우 역을 맡아 용맹하고 의리있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대립군(代立軍)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받고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조선시대 군인을 말한다.

영화는 피란한 임금 선조를 대신해 임시조정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세자 광해(여진구 분)가 대립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는 과정(픽션)을 그렸다.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이정재를 만났다.

“기획이 참신하고 소재가 특이했어요. 이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싶었죠. 대립군과 관련한 작은 사실을 극대화해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오늘날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선조를 대신해 전장 한복판에 나온 광해와 남의 군역을 대신하는 토우는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비슷한 처지다. 모든 것이 미숙하고 어리기만 한 광해는 토우를 만나 군주의 의미와 역할을 서서히 깨달으며 성장해간다.

“‘진정한 군주는 백성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메시지가 현 시국을 적절히 은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내용을 전면에 내세우면 부담스럽죠. 이 때문에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통분모를 앞세웠어요. 두려움입니다.”

영화에서는 전란 중 왕부터 대립군, 백성까지 두려움을 마주한다. 그들이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왜군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정재는 “악인과 싸우는 영화가 아니다”며 “이 영화에 악인은 없으며 그게 영화의 주제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관상’의 수양대군처럼 토우도 선 굵은 캐릭터지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맡았다고 했다. 토우는 거친 남자여서 얼핏 자신과는 멀리 있는 캐릭터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감성적으로는 자신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관객까지 대변할 수 있다고 느꼈다.

“거칠어 보이지만 힘든 일상을 꾸역꾸역 이겨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초기에는 토우 역을 어느 정도의 톤으로 가져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마당쇠’로 가는 것보다는 선임하사 같은 인솔자로 가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전투 신은 기존 사극과 다르다. 왜군과 대립군이 가까이 붙어서 칼싸움을 하면서 상대의 목을 칼로 베어버리는 식이다. 전통무예 고수가 칼싸움 액션을 사실적으로 지도했다고 한다.

“장검으로 실제 싸운다면 칼끼리 부딪히는 모습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칼날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부분이 의외로 넓어서 막상 전투가 발생하면 붙어서 치르는 게 효과적이라고 해요. 우리도 가까이 붙어서 액션 신을 펼쳤어요. 그게 더 잔인하고, 치명적입니다.”

광해와 대립군들이 왜군을 피해 산길을 거쳐 의병 집결지로 가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은 정말 고됐다고 술회했다. 지난해 9월부터 전국 산을 돌면서 새벽에 일어나 고지로 올라 촬영한 뒤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액션 신까지 펼쳤으니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발목을 삐어 깁스한 분이 많았어요. 저도 발목과 손목을 삐었고요. 한순간에는 갈비뼈가 부러진 줄 알았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는 친구인 정우성과 함께 연예기획사 아티스트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하정우 고아라 염정아 등 20명 가까운 인기배우를 거느리고 있다.

“회사에 거의 매일 출근해 다른 배우들과 어울립니다. 시나리오를 함께 읽어주거나 오디션 볼 때 팁을 주는 등 선배로서의 경험을 나눠줍니다. 소속 배우를 선택할 때는 두 가지를 고려합니다. 자기 일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첫 번째고, 모나지 않고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인성을 지녔는가가 두 번째 기준입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