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쁘다 - 천양희(1942~)

[이 아침의 시] 나는 기쁘다 - 천양희(1942~)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와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를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 지성사) 中


살다가 잃어버린 것들과 그래서 슬프고 단념해야 했던 일들과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지나고 나면 이렇게 담담한 어조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기쁘고,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기쁘다고요. 그리고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밝게 하는 지혜를 얻어 사람 사는 일을 기쁨으로 바꿀 줄 알 때, 순결하고 자유로우며 희망적인 삶을 살 수도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김민율 < 시인(2015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