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창조과학부가 연구자가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기 위해 작성하는 서류 부담을 크게 줄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연구자가 5억원 안팎의 연구비를 받기 위해 평균 70~100쪽의 연구개발계획서와 집행계획서를 작성해야 하던 것을 앞으로는 5억원 이하는 5쪽 이내, 5억원 초과는 10쪽 내외로 제출하면 된다는 내용이다. 연구행정 간소화로 연구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환영할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연구계획서가 줄어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게 평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생각할 점도 적지 않다.

그동안 연구계획서가 담아야 할 항목이 늘어난 배경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국민 세금으로 수행하는 국책연구과제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자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구자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을 정도로 부담이 돼 줄여야 한다면, 연구자와 평가자 간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할 조치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간단한 서류만 보고도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평가자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불행히도 한국의 연구평가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철저히 평가자의 ‘전문성’을 우선시하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공정성’이라는 미명하에 광의의 평가자 집단을 구성한 다음 무작위로 평가자를 뽑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감사를 의식한 이런저런 ‘상피제도’로 인해 진짜 전문가는 배제되기 일쑤다. 평가자의 전문성이 연구자의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해 연구자가 자괴감을 느낄 정도라면 말 다한 것 아닌가.

후진적 평가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연구계획서 분량만 줄인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깜깜이’ 평가로 흘러가 국책연구과제 선정이 행운권 추첨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