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화선지에 품은 세상…권영우 화백의 '백색마술'
찢어진 종이 사이로 하얀빛이 일렁인다. 붓끝에서 피어난 하얀 기운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수묵처럼 번진다. 한국 단색화의 선구자 권영우 화백(1926~2013)의 작품 ‘무제’(사진)다. 달항아리 백자와 같은 특유의 배색미를 담아 미술이 고요하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 화단이 서구 양식을 두서없이 도입한 1960~1970년대에 한국화의 변화를 꾀한 그의 외로운 분발이 놀랍다.

16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하는 ‘권영우 개인전’은 그의 이런 정신을 오랜만에 돌아볼 수 있는 자리다. 1946년 서울대 미대 1기로 입학해 동양화를 전공한 권 화백은 1958년 ‘바닷가의 환상’으로 국전에서 장관상을 타며 주목받았다. 젊은 시절 전통적인 한국화에 매달린 그는 1962년부터 붓과 먹을 버리고 한지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종이의 화가’로 거듭났다. 이후 1978년부터 10여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머물며 종이 단색화 작업을 이어갔다.

‘다양한 백색(Various Whites)’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1950년대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은 물론 1962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완성한 추상화 30여점이 걸렸다. 대부분 크기가 작은 소품으로 유족이 그동안 공개를 꺼려왔던 작품들이다. 권 화백이 사용한 미술 도구와 자필 편지, 스크랩북, 도록 등도 나와 있다.

권 화백은 한지를 그림의 바탕으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종이 자체를 그림으로 이용했다. 한국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붓과 먹 대신 칼, 송곳 같은 도구를 활용해 한지를 겹쳐 바른 화면을 뜯고 뚫고 긁고 찢는 게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는 추상’이 아니라 ‘만드는 추상’인 셈이다. 이렇게 탄생한 그의 종이 작품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겪은 수많은 배신과 파괴, 상처와 분노의 흔적을 백색미학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권 화백은 그림을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 정체성을 발견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갤러리는 오는 23일부터 열리는 아시아 최대 미술장터 아트바젤 홍콩에서도 권 화백의 작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전시는 다음달 30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