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에 실려있는 블랙박스는 항공 사고 원인을 찾는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국내 연구진이 이번에는 원전 사고가 났을 때 원인 분석은 물론 사고 수습까지 할 수 있는 원전용 블랙박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처럼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 수습에 활용할 수 있는 획기적 기술로 평가돼 앞으로 원전 안전 기술 시장에서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발전소 운영과 비상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조작하는 원전용 블랙박스를 개발했다고 8일 발표했다. 유럽의 원전 기업인 아레바에서 이동형 원격 안전감시평가설비를 구축할 예정이지만 극한 환경에서 사용되는 블랙박스 시스템이 개발된 건 처음이다.

이번 연구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처럼 중앙 제어실이 손상되고 전력공급이 끊겨 기능을 상실할 경우 원자로의 상태 확인은 물론 조작과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을 막기 위해 처음 시작됐다. 후쿠시마 사고가 조기에 수습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발전소 내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고 초기 모든 전기 공급원이 상실되어 계측제어기기가 작동하지 않아 사고 진행 정도를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고 회복을 위한 초기 대응 실패로 연결됐으며, 사고를 조기에 마무리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 블랙박스는 원전 사고가 났을 때 즉시 현장 상황 정보를 실시간 저장한 뒤 인공위성을 통해 발전소 바깥에 있는 이동 상황실에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화재로 생긴 뜨거운 열과 높은 방사능 환경에 견디게 설계됐다. 전력 공급 차단에 대비해 충전용 배터리로 작동하고, 침수에 대비한 방수기능과 수소가스 폭발에 대비한 방폭 기능까지 갖췄다. 현재 제작한 시제품은 섭씨 80도와 1.2kGy(킬로그레이) 방사능 환경에서 견딜 수 있다. 연구진은 2022년까지 200도와 5kGy 수준으로 향상시켜 상용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연구원 측은 차량 형태의 원격감시제어실도 함께 개발했다. 한 명이 원전 8개 호기를 동시에 감시, 통제할 수 있다. 연구원측은 사고 현장으로부터 반경 30km 떨어진 곳에서 천리안 위성 시험을 통해 정상적으로 블랙박스가 작동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김창회 원자력연구원 계측제어‧인간공학연구부장은 “블랙박스와 모바일 원격감시제어실은 2022년 초 연구개발 종료 시점까지 상용화를 추진해 이르면 2025년 경 국내 원전 현장에 적용될 것”으로 전망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