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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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미국 뉴욕에서 일식 레스토랑 ‘노부(NOBU)’의 인기는 단연 최고다. 이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인 노부유키 마쓰히사. 그는 일식에 페루식 조리법을 가미해 날생선에 입도 대지 않던 미국인의 입을 열었다. 일식 세계화의 주역으로 꼽힌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레스토랑 ‘마쓰히사’를 ‘세계 10대 레스토랑’에 선정했다. 그는 지금까지 세계 33개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을 열었고, 일식을 대표하는 요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에게도 뼈아픈 실패의 시절이 있었다.

스시에 눈뜬 10대 청년

노부유키는 1949년 일본 사이타마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형들은 일을 하며 집 밖에 있었고, 그는 할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일본 남자들은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난 늘 주방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스시를 처음 맛본 건 11세 때였다. 당시 일본에는 스시를 파는 식당이 많지 않았고 값도 매우 비쌌다. 아버지와 함께 노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그가 안쓰러웠던 친형은 그를 스시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그때 느꼈던 맛과 경험이 인생을 바꿔놨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방장은 ‘이랏샤이마세(어서오십시오)’를 힘차게 외쳤고,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생선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줬다. 난생처음 느낀 열정적 분위기에 매혹됐다. 스시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문제아였던 그는 사이타마에서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쫓겨났다. 곧장 도쿄로 가 신주쿠의 마쓰에스시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1주일에 7일 내내 일했다. 그곳에서 6년 넘게 근무했다. 그를 눈여겨본 페루계 일본인 고객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페루로 가 일식 레스토랑을 열자는 것이었다. 그는 막 결혼한 상태였고, 성공의 기회를 잡고 싶었다. 이 제안을 수락했다. 24세에 페루의 수도 리마로 향했다.

세 번의 사업 실패

페루에는 생선이 넉넉히 공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생선 외 다른 재료들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사용하던 질 좋은 쌀과 해초가 없었고, 현지 재료를 쓸 수밖에 없었다. 페루 전통 음식과 일식을 조화한 퓨전 요리를 내놨다. 그는 이렇게 완성한 자신의 요리를 ‘용감한 음식’이라고 불렀다. 페루에서의 사업은 오래가지 않았다. 3년 뒤 동업자와의 관계가 틀어졌고 가게는 파산했다.

훗날 페루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일식의 변주를 가능케 하는 열쇠가 됐다. NY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당시에 대해 “일식의 의례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새 사업 파트너를 만났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신선한 생선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식(食)문화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느린 속도로 나오는 일식 요리를 견디지 못했다. 하루에 손님 한두 명만 받는 날이 계속됐다. 1년 만에 레스토랑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외국에 일식을 소개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친구가 그에게 알래스카행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외국 사람들에게 일식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부인은 허락했다.

알래스카에서의 마지막 기회는 성공했을까. 아니다. 그는 사업을 위해 친구에게 1만5000달러를 빌렸다. 앞서 실패한 두 레스토랑의 투자비용에 대한 빚까지 떠안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9개월의 철저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그해 10월 첫 주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몇 주간 지칠 줄 모르고 손님들을 받았다.

그해 추수감사절(11월 셋째주 일요일)에 첫 휴일을 가졌다. 한밤중 그의 집에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수화기를 통해 레스토랑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그는 미국 경제매체 Inc와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LA서 잡은 기회

그의 도전이 알래스카에서 끝났다면 성공 스토리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꾸준히 주사위를 던졌고, 그러던 끝에 기회를 잡았다.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스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친구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좌석이 6개밖에 없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당장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소의 심장구이 소스를 곁들인 연어 필레와 사시미 타코 같은 페루 스타일의 일식 요리를 선보였다.

1987년 가능성을 엿본 그의 친구가 새 레스토랑을 열라며 7만달러의 투자금을 내줬다. 노부유키는 LA 베벌리힐스에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 마쓰히사를 열었다. 이곳에서 그의 운명을 바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 로버트 드니로가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그는 레스토랑의 메뉴에 만족해했다. 노부유키에게 뉴욕에 분점을 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메뉴를 더 개발해야 하고 빚을 청산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드니로는 뉴욕에 살고 있었지만 LA를 방문할 때마다 그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4년간 끈질기게 노부유키를 설득했다. 1994년 노부유키는 드니로의 투자를 받고 미국 뉴욕에서 일식 레스토랑 노부를 열었다.

당시 뉴욕에 있던 일식 레스토랑들은 엄격한 일본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그의 레스토랑은 달랐다. 일본식 예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식의 기본양념은 와사비와 간장 대신 페루 방식의 소스를 활용했다. 주위에서는 6개월을 못 갈 것이라고 비웃었다. 새로운 방식의 일식 레스토랑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주류였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날생선을 먹는 데 거부감이 있던 미국인도 일식과 페루식 조리법을 결합한 노부 스타일 일식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기에 힘입어 미국 전역으로 지점을 늘려갔다. 노부유키는 현재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일식 레스토랑 33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레스토랑이 세계적 인기를 얻으면서 그 역시 일식 요리사의 대명사가 됐다. 그가 알래스카에서 포기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는 미국 일간지 라스베이거스리뷰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알래스카에서의 경험 이후 나는 천천히 하나씩 이뤄가겠다는 철학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