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대선후보들의 경제지력 너무 낮다
오랫동안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궤도 운동을 했다. 하늘이 아니라 지구가 열심히 돌고 있다는 것은 천체물리학의 공부 결과들이 쌓이면서 정립된 지식이다. 지동설 이전의 사람들에게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장경제 원리를 설명하는 것도 그렇다. ‘경쟁이야말로 정의롭다’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장은 약탈이며, 독점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것이며, 기업가들이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격은 원가에 적정 이윤을 더한 것이라야 하고, 거래는 윤리규칙을 따라야 하며, 국가가 시장의 감시자로 감독의 눈길을 번득이지 않으면 언제나 강자의 규칙이 관철되는 약육강식이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경제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한국 정치권의 집단경제지력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마도 경쟁대상이라고 거론할 만한 나라는 그리스나 아프리카 오지 정도이지 싶다. 할아버지 파판드레우는 하버드 경제학 박사 출신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대선 과정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보장하겠다. 저기 은행에 쌓여 있는 돈은 모두 우리들의 것이다”를 외치며 그리스 ‘표퓰리즘’의 기초를 닦았다. 아들 손자도 거짓 구호의 바통을 이어갔다. 파판드레우 가문은 당시 자동차 조선 등 꽤 경쟁력이 있던 제조업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과도한 복지제도를 만들면서 그리스가 3류 국가로 가는 재정파탄의 길을 닦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밀어넣고 서둘러 대통령 선거판을 차리고 있는 정치권은 너나없이 경제민주화를 경제정책의 골격으로 삼는다는 정강정책을 내놨다.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골목상권을 보호하며,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원가후려치기를 막고,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를 금지하며, 대기업의 소유 경영체제를 해체하며, 기업의 잘못은 신체형으로 중벌을 때리는 등의 경제민주화 시즌 2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민주화 공약은 정의당에서부터 민주당, 바른정당,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다를 것이 없다. 그럼 이런 정책이 가져올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부(富)의 불균형이며, 중소기업의 좀비화며, 경제성장의 후퇴며, 골목길의 비좁아 터지는 과당경쟁이며, 비명소리며, 불완전 취업이며, 넘치는 것은 아르바이트 자리밖에 없는, 그 결과인 가난과 실업이 강물처럼 흐르는 추하고 어리석은 국가다. 다른 길은 없다. 원가를 후려치지 못하게 하는 곳에서 시장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가혁신을 만들어낸 기업에 납품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경제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취업 기회가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치열한 입사경쟁이 없다면 누군가의 전화 한 통으로, 누군가의 연줄로, 나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일자리 자체가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원가후려치기도 마찬가지다. 원가후려치기를 견뎌내는 기업이라야 국제적 기술 기업이 될 수 있고 세계적 밸류체인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현대차와 삼성전자의 1류 납품업체들은 모두 그런 혹독한 과정을 견뎌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재벌을 해체하고 쪼개는 것이 아니라 재벌을 50개, 100개로 키우는 것이다. 아니, 올망졸망한 내수 중소기업만 키워서 무슨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인가.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취업희망자는 없다. 놀고먹는 대학이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학을 만들어야 그것에 걸맞은 고소득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시장경제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경제규칙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회 주변을 얼쩡거리는 정치건달일수록 국가 보조금이나 타먹을 수 있는 골목길을 부여잡게 된다. 빈부 격차는 형평을 추구했던 노무현 정부 때 가장 크게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대선후보들의 경제지력이 의심스럽다. 바보들이 춤추는 세상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