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필요한 때
털이 숭숭한 고양이의 앞발과 하이파이브하는 장면이 흐뭇하게 눈앞을 맴도는 영화가 있다. 마약 중독으로 거리를 떠돌며 꿈이란 꿈은 모두 말라버리고 가족과 친구에게서도 버림받은 영국의 한 청년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양이와 함께 지내면서 삶의 희망을 채워가는 훈훈한 줄거리다. 영화로 소개되기 몇 년 전인 2012년 책으로 먼저 선보인 ‘내 어깨 위의 고양이, 밥’이다. 고양이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주인공은 실제 인물을 닮은 배우를 캐스팅했고,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고양이는 진짜 그 고양이가 맡았다고 한다.

물론 고양이가 청년을 응원하기 위해 하이파이브를 한 것은 아니다. 그 고양이는 손바닥을 자기 얼굴 앞에 불쑥 내미는 사람의 동작에 나름대로 방어하듯 반응한 것일 뿐인데, 우리가 그 동작을 인간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에게서 우리가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골라내 보려 한다. 순수하고 본능적이며, 장난을 치거나 모험을 즐기는 동물 주인공들을 통해서 우리는 솔직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체면이나 남의 이목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하이파이브하는 고양이처럼 인간의 습성을 흉내 내는 동물, 아니 인간의 방식대로 해석할 수 있는 동물은 세계적으로 문학과 예술적인 상상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신윤복이 그린 개의 그림을 보면,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바둑이가 쓸쓸히 쪼그려 앉아 홀로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화가가 바둑이의 외로운 마음을 정말로 꿰뚫어 본 것일까? 아마도 달빛 아래 우두커니 앉아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은 바둑이가 아니라 화가 자신이 아닐까 싶다.

서양의 《이솝우화》에서도 동물들은 의인화돼 인간 생활의 습관을 그대로 따른다. 동물 캐릭터들은 행동만 인간처럼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잔머리도 굴릴 줄 안다. 동물이 나오는 문학작품은 대부분 어린이 독자를 겨냥한 것이지만 어른 독자층을 위한 소설도 있다.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이 대표적인 예인데 점잖은 체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세상을 적나라하게 조롱하는 책이다. 동물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관찰된 후 인간사회에 알맞은 상징성을 띠게 된다. 사실 상징체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이 세상에 관한 정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다. 그러니까 동물 상징이란 동물에 대한 인간 고유의 시선과 공감과 편견이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날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아서 그런지 신년을 대표하는 동물인 닭이 화두에 오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닭 이미지가 나오는 유물 전시를 통해 예로부터 닭이 어떤 상징성을 품어왔는지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하달홍은 고사를 인용해, 닭의 다섯 가지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닭은 머리에 벼슬이 있으니 글(文)에 뛰어나고, 발톱이 날카로워 싸움(武)에도 능할 뿐 아니라, 적을 보면 물러서지 않으니 용맹(勇)하며, 먹을 것을 보면 서로 구구구 부르니 마음씨가 어질고(仁), 어김없이 때를 맞춰 소리치니 시계처럼 믿을(信) 만하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닭이 이처럼 인간사회에서 꼭 필요한 미덕을 지녀 본받을 점이 많다고 여겼고 그림을 비롯해 여러 생활용품에 그 모습을 담아냈다.

그러나 닭에 얽힌 동서양의 수많은 민담과 우화를 제치고 올해는 유독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참회 이야기가 선두로 회자되니 이상한 일이다. 새벽닭이 울 때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그제야 기억해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여기서 닭의 울음이 상징하는 바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자 자신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용맹하고 어진 닭의 미덕도 좋지만 당장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싶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