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정경유착 아닌 '정경갑을'
용어를 분명히 하자. 잘못된 용어로 인한 오해와 혼란이 매우 크다. 기업들이 정부의 압력에 의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거액의 출연금을 낸 것을 정경유착이라고 낙인찍으며 돈 낸 기업들을 마치 죄인 취급하고 있다. 정경유착이란 기업인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정치인은 반대급부로 기업인에게 특혜를 베푸는 정치인과 기업인 사이의 밀착관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에 의하면 기업들이 두 재단에 출연금을 낸 것은 어떤 대가와 특혜를 바라고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낸 것이었다. 성금을 적게 냈다고, 대통령에게 밉보여서, 그룹을 통째로 날려버린 전례가 있는 나라 아닌가. 이것은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기업들에 갑질한 ‘정경갑을’이다.

한국의 기업들에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정경유착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특히 대기업집단이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의 특혜를 받아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물론 한국의 대기업집단이 1960~1970년대 정부의 수출진흥정책과 중화학공업정책에 따라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특혜를 누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기업들이 정경유착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똑같이 특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기업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남고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경영을 잘해서 성공한 것이 아닌가.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망하게 돼 있다. 실제로 소비자의 선호 변화와 시장상황을 무시하며 정경유착과 정부의 특혜에만 의존한 기업들은 다 망했다. 한국의 대기업집단이 지금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며 생존해 왔다는 사실은 그 경영능력이 탁월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한국의 대기업이 축적한 부의 많은 부분은 경쟁이 치열한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기업집단의 성장을 정경유착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매우 감정적이고 편협한 것이다.

물론 정부정책에 따른 ‘소극적’ 정경유착 외에도 적극적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받으려는 ‘적극적’ 정경유착도 있다. 정치권에 뇌물을 주는 대가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내거나, 자신의 기업에 유리하도록 법과 규제를 만드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경쟁상품에 관세를 인상하게 하는 행위나 자신의 산업에 신규 진입을 제한하는 규제를 강화하도록 하는 행위가 그것들이다. 이런 적극적 정경유착은 경쟁자들을 배제하거나 불리하게는 만드는 행위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이런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250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런 기업인들의 행위를 비난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그런 정경유착이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17세기 유럽에서 면직물이 처음 나왔을 때 프랑스의 부유한 양모업자들은 자신의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왕을 설득해 면직물을 금지했다. 영국에서도 동일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해 영국의 면직물은 산업혁명의 기초가 됐다. 1982년 노벨상을 받은 스티글러는 이런 정경유착을 포획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강한 소규모 집단이 자원배분 강제력을 가진 정부를 포획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부 규제가 만들어지도록 한다는 것이 그의 포획이론이다.

정경유착이든 정경갑을이든 이 모든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 그것은 기업들에 아무리 정치인과 관료에게 돈을 갖다 주지 말라고 청문회에서 윽박지르고 특검을 해봐야 사라지지 않는다. 궁극적인 원인은 정부 권력의 비대함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 권력이 비대하면 그 정부 권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또 정치권이나 정부에 신경 쓰지 않을 경우 생존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기업의 선택은 정치권이나 정부와의 관계 유지다. 정말로 정경유착과 정경갑을을 없애고 싶으면 정부 권력을 줄여 정치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 한국제도경제학회장 jwan@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