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산다는 건] "비판기사 왜 못 막나" 장관에 깨지고 "부처 앵무새냐" 기자들에게 터지고
지난 18일 정부서울청사 회의실. 25개 주요 정부부처의 ‘입’으로 불리는 대변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를 주재하던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사퇴한 뒤 3주 만에 열린 대변인협의회다. 새로 부임한 유동훈 문체부 2차관은 이날 각 부처 대변인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렸다. ‘입을 다물라’는 것이었다. 최순실 사태 때문에 처진 공무원 사회 분위기를 언론에 전달하지 말라는 얘기다. 한 경제부처 A대변인은 “기자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전화해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며 “그럴 때마다 입을 열 수도, 아예 입을 닫을 수도 없는 지금 처지가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한 홍길동 같다”고 털어놨다.대변인은 부처 정책을 홍보하고 부정적인 기사는 가급적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언론에 정보를 제공할 의무도 있다. 그렇다 보니 부처 장·차관한테선 “왜 그 기사를 못 막았느냐”는 질책을, 기자들로부턴 “부처 앵무새냐”는 비난을 받기 쉬운 자리이기도 하다.

◆장·차관 기사 못 막으면…

대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장·차관을 ‘조지는’ 기사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온 나라를 뒤엎자 요새 각 부처 대변인이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도 ‘윗선에 튈 불똥’이다.

최순실 사태 관련 기사에 혹여 해당 부처 장·차관 이름이 함께 오르내리기라도 하면 대변인은 ‘멘붕’이 된다. 해당 언론사를 찾아 읍소하는 건 기본이다. 만약 기사를 못 빼면 사표를 각오해야 한다.

B부처에선 장관을 조지는 칼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대변인이 3개월 만에 그만두는 일도 있었다. 반대로 C부처에선 장관에 부정적인 기사가 나올 때마다 몸을 던져 막은 대변인이 1급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책 홍보는 뒷전으로 미루고 장관만 쳐다보는 대변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최근 D부처 대변인실은 간부들에게 돌리는 신문 스크랩에서 장관을 비판하는 기사를 은근슬쩍 빼는 버릇이 생겼다. 다른 부처 대변인은 “기사가 나온 사실을 알아야 대응책도 마련할 텐데 조직 보신주의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순실 사태 후 ‘1인10역’

대변인의 하루는 누구보다도 길다. 대개 오전 6시께 출근해 한 시간가량 조간신문을 체크해 8시께 장관에게 주요 기사를 브리핑한다. E부처 대변인은 “전날 세종시에서 기자들과 술을 마셔도 장관이 서울에 있으면 8시까지 장관 집무실에 도착해 보고해야 한다”며 “체력이 대변인의 최고 자질이라는 사실을 매일 아침 느낀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부처 정책 홍보를 강화하라는 주문이 이어지면서 대변인은 더 바빠졌다. 부처마다 ‘정책 홍보 성적표’가 매달 한 번씩 나오는 탓에 점수의 기준이 되는 장관 기고문과 인터뷰, 브리핑 일정 등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비록 ‘김영란법’ 시행 이후 횟수는 줄었지만 기자들과의 스킨십도 게을리할 순 없다. 지난해 6월 부임한 사회부처 F대변인은 송년회에서 “부임 후 6개월간 소맥(소주+맥주) 3000잔을 마셨다”고 건배사를 했을 정도다.

◆말실수로 죽는 직업

부처의 ‘입’ 역할을 하는 만큼 설화(舌禍)도 많다. 다른 부처와 달리 대변인이 브리핑을 도맡아 하는 국방부 외교부는 그만큼 공개되는 실수도 잦다. 사드 전자파 안전거리 기준을 두고 한 기자가 “정부가 내세운 기준인 100m 밖인 101m부터는 전자파가 뚝 떨어지느냐”고 묻자 관련 정보가 부족했던 국방부 대변인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을 내뱉었을 때 동석했던 당시 대변인은 현장에서 발언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수습에 서툴렀던 죄로 3개월 감봉과 함께 세종시 부교육감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심성미/김주완/오형주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