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12)]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서산휴정(西山休靜·1502~1604) 대사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임종할 무렵 영정(影幀)에 직접 남긴 글(影讚)이라고 전한다. 뒷날 이 영정이 대사가 하던 역할을 일정 부분 대신할 것이라는 의미다. 이로써 짐작건대 열반 전에 이미 진영(眞影)이 존재한 것이다. 재세(在世) 시의 영정은 흔한 일이 아니다.

생존 시 진영(도사, 圖寫) 제작은 권위의 상징이요, 죽은 뒤 만든 진영(추사, 追寫)은 후인들의 추모가 목적이다. 그리고 훼손 혹은 필요에 따라 뒷날 여러 점을 다시 베끼는 모사(模寫)도 있기 마련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古)영정들은 대부분 모사라고 하겠다. 재미있는 것은 어진(御眞·임금 영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른바 ‘얼짱 각도’로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일본 교토(京都) 고잔지(高山寺)는 현존하는 원효(617~686) 대사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소장하고 있다. 13세기 작품이라고 한다.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를 가진 담대하면서도 서민적 인상으로 묘사했다. 뒷날 이를 모사한 화가의 국적은 일본이지만(한국인 설도 있긴 하다) 우리나라 화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본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정은 진영(眞影)이라고도 한다. 인물의 겉모습인 영(影)과 내면적 모습인 진(眞)의 합성어다. 영(影) 속에 진(眞)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화공들은 심혈을 기울였다. 선가(禪家)에서는 ‘이영심진(以影尋眞)’이라고 했다. 그림자(影)를 통해 참(眞)을 찾아간다(尋)는 뜻이다. 영정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영정을 보고 있는 당사자의 참모습까지 찾으라는 뜻이다.

영정을 모신 곳이 진영전(眞影殿)이다. 당나라 황벽(黃檗, ?~850) 선사가 재가(在家) 고수인 배휴(裴休, 797~870) 정승과 처음 만난 곳이다. 대뜸 “진영은 여기에 있는데 그 고승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즉시 “그것을 묻는 배상공(裴相公)은 어디에 있소?”라는 답이 돌아왔다. 없는 사람 찾지 말고 있는 당신이나 잘 살피라는 한 마디는 큰 울림을 주었다. 진영 제작 후 80년 즈음의 일이었을까?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