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베트남 한 마을에 있는 비석에 쓰인 글귀다. 이 글귀가 증오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과거 전쟁을 치른 미국이나 현재 영유권 분쟁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 등을 생각하겠지만, 정답은 한국이다. 이 비석 이름은 ‘한국군 증오비’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웠다. 베트남 곳곳에는 이 같은 한국군 증오비가 남아있다. 한때는 수백 개가 세워졌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은 한때 섬뜩한 문구로 증오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반감이 컸고 아직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베트남전쟁은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벌어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 전쟁이다. 미국은 당시 남베트남을 지원했다. 한국도 미국의 요청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병한 국가다. 30만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군에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한국과 베트남은 베트남전 종전 17년 뒤인 1992년 4월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했다. 같은 해 12월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한국 측이 “악연이라도 유연(有緣)이 무연(無緣)보다 낫다”고 하자, 베트남 측은 “우리는 현명한 민족이므로 과거에 집착해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화답했다. 2001년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한 차원 발전시키자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2009년에는 이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역대 대통령들은 한 번씩 베트남을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해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2013년 국빈방문 당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역을 찾았다.

두 나라가 정치·외교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베트남 국민의 반한(反韓) 감정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전쟁 당시 가족을 잃은 이들과 직접 참전한 이들이 남아 있어 한국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베트남 국민이 여전히 많다는 설명이다.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많이 진출했고 최근 한류 열풍이 불면서 드러내놓고 한국에 적대감을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등 과거사를 거론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현지 관계자들은 말했다.

‘라이따이한’ 문제도 베트남 국민의 반한 감정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라이따이한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아버지 다수는 베트남전쟁 이후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라이따이한이 몇 명인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