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이변'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죽순에 비유하곤 한다. 하루에 30㎝ 이상 쑥쑥 크는 죽순은 땅속에서 5~6년을 자란 뒤에야 지상으로 올라온다. 죽순 한 촉이 올라오기까지 대나무는 땅속의 수많은 마디에 ‘미래 에너지’를 저장한다. 시 한 편이 나올 때까지 오랜 발아·성장·숙성 과정을 거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다. 대중가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115년 만의 이변’이라고들 하지만, 음송(吟誦)과 노래가 한 몸인 시의 본질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문학이 ‘시(운문)와 노래(리듬), 이야기(산문)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 그렇다.

트럼프, 저류변화 흐름 포착

기적이 불가능을 전제한 말이라면 이변은 가능성을 내포한 용어다. 괴테가 기적을 ‘신앙의 자식’이라고 한 것에 비해 이변은 ‘현실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이변도 다르지 않다. 16세기 세계 제국인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상대적으로 열세인 섬나라 영국에 대패한 것은 17년에 걸친 틈새 붕괴의 전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크기의 네덜란드가 17세기 황금시대를 이룬 것은 종교 탄압으로 오갈 데 없는 유대 상인들을 대거 받아들인 덕분이다.

문명사적 대전환은 이런 복합 요인으로 이뤄진다.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비슷한 징후가 반복적으로 선행된다는 ‘하인리히 법칙’도 같은 맥락이다. 저류의 변화를 읽지 못하면 청맹과니가 된다.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갑자기 실명에 빠진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실명은 도시 전체로 전염되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트럼프의 ‘대역전’도 이변이 아니다. 미국 언론과 조사기관 대부분이 클린턴의 승리를 점쳤지만 그건 ‘눈먼 자’들의 확증편향(자신의 선입관에 맞는 정보만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에 다름 아니다. 하루 전날 CNN은 클린턴 당선 확률이 91%라고 했고, 개표방송 막판까지도 오보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 등 주류 미디어의 80%가 그랬다. 이른바 식자층의 백색실명이다. 여론조사 때 속마음을 다 드러내지 않는 ‘브래들리 효과’와 ‘침묵의 나선이론’, 백인 중산·서민층의 투표율 등 기저 흐름을 짚어내지 못한 탓이다. 그래 놓고 ‘대이변’이라며 뒷북을 친다. 레이건 때도 그랬고, 트루먼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때도 그랬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결과다.

눈먼 자들은 확증편향에 갇혀

선거 판세를 결정한 사람들은 말없는 다수였다. 이들은 간단하고 명징한 선거 공약으로 풍요롭고 위대한 미국 건설을 외치는 트럼프의 실용적 리더십에 열광했다. 낡은 정치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이른바 항산(恒産·생산적 풍요)이 있어야 항심(恒心·정치적 도덕)이 있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입증한 것이다. 트럼프가 ‘민주당과 좌파 언론이라는 두 적’과 현직 대통령 부부의 편파적인 응원까지 뛰어넘고 승리한 비결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한·미관계 등 신(新)외교 지형에 대응하는 전략은 ‘죽순과 땅속 줄기’의 보이지 않는 힘을 제대로 알아야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만 국제사회의 ‘눈먼 도시’에 고립될 뿐이다. 정치·경제·사회적 혜안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촉감까지 다 동원해도 부족하다. 시 한 편, 죽순 하나에도 그럴진대 미래 존망이 달린 국가대사야 더 말할 나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