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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칼럼] 광장의 유혹

입력 2016-11-07 17:36:39 | 수정 2016-11-08 03:55:05 | 지면정보 2016-11-08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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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서면 새 세상 만드는 역사의 최전선에 있다는 현장감에 몸을 떤다

문재인의 권력이양 요구는
그러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헌적 발상
모두가 시험에 들고 있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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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영국 고등법원의 브렉시트 판결은 놀랄 만했다. 영국 정부가 리스본 조약 50조에 의거해 EU 탈퇴 협상을 시작하려면 국민투표와는 별도로 의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난 6월의 국민투표가 뒤집어질 수도 있게 되었다. 당연히 브렉시트 지지파들은 ‘국민의 의지가 전복되었다’며 격분하고 있다. 물론 영국 의회가 ‘국민의 의지’를 전복할 가능성은 없다. 의회의 토론과 형식상 찬성결의를 요구할 뿐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떻든 법치의 진면목이다. 프랑스 혁명을 광장의 폭력이라고 혹평했던 18세기 에드먼드 버크를 연상케 하는 실로 영국적 판결이다. 프랑스는 결국 버크가 예언한 대로 이후 100년 동안이나 혁명과 반혁명, 독재와 전쟁을 되풀이했다. 다시 100년을 건너뛰어 68혁명에 이르면 프랑스인에게 광장의 유혹은 거의 고질병이 되고 만다.

누구라도 광장에 서면 거침없이 내달리는 역사의 바람을 가슴 깊이 숨쉬게 된다. 최인훈은 ‘분수가 터지고 꽃이 피고 영웅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곳’으로 ‘광장’을 정의했지만, 한편으로는 ‘폭동의 피가 흐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4·19에서나 극단적으로는 5·18에 이르기까지 광장은 실로 숭고한 감정과 무자비한 폭력이 뒤엉켜 들었다. 광장은 그렇게 위험한 장소다. 대중의 환호 속에 마녀사냥이 집행되고, 집단의 열정은 종종 핏빛 충돌 에너지로 전환된다.

광장에 서면 우리는 처음 얼굴을 마주친 사람과도 깊은 동지애를 느끼고 목이 터져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정신의 확장과 양심의 약동을 느끼게 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할 때면 벅차오르는 우정과 시민의식을 공유한다. 이제 시민이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역사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현장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지도자의 비행을 규탄하며 그들의 도덕적 타락을 공격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한때 으스대던 지도자를, 누구의 제지도 없이 멸시할 수 있는 자유는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저주와 모욕, 비아냥과 깔보는 언어들은 그 자체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킨다. 최순실 사건의 가장 좋지 않은 점은 그것이 시민의 덕성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나의 유죄가 입증되자 모든 작은 행동들까지 유죄의 증거로 나열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대부분 체육특기생들이 수업일수를 다 채운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지 않은가. 기업들이 강제모금에 동원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놀라는 얼굴도 그렇다. 8선녀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인지,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심신 양면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미 대사관의 분석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이 빈약한 증거들은 합리적 의심을 피해가기 어렵다. 집단 신념은 때로 무고를 정당화한다. 사실로 확인된 것은 길바닥을 뒹구는 프라다 신발 외엔 아직 별로 없다. 광장의 놀림거리가 된 박 대통령이었지만 지난주 최순실 없이 작성된 2차 사과 연설문은 다른 연설보다 더 진솔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우리는 시뮬라시옹이라고 부른다. 광우병이 그랬다. 광장은 독특하고 역동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지만, 심성 깊이 내재한 어두운 일면을 드러낼 수도 있다. 법치를 무너뜨리며, 사실(facts)에 눈 멀게도 한다. 마오의 문화혁명도, 킬링필드도 어린 학생들의 선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파괴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권력을 빼앗자는 것은 광장의 가장 강렬한 유혹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씨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권력이양’을 요구하고 있다. 총리와 각료를 국회에서 지명하고 대통령은 권력을 이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나쁜 발상이다. 아예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광장의 폭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되고 만다. 물론 그럴 리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절대반지의 그것처럼 강하게 유혹에 빨려들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시험에 들고 있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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