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할머니의 고구마가 그립다
고구마는 정말 그리운 음식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유년 시절 고구마와 감자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나도 어렸을 적 끼니를 고구마 감자로 때웠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진료실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20여년 전 서울 역삼동에서 한의원을 하던 시절, 할머니는 나에게 허리 치료를 받고 병이 나았다고 했다. 이번엔 기침병이 생겨 또다시 나를 찾고자 역삼동에 갔는데 한의원이 이사가고 없어져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았다고 했다.

나는 기침뿐만 아니라 무릎, 어깨, 손가락 마디마디 할머니의 아픈 부위를 정성껏 치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고구마 한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나에게 주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 고구마를 삶으셨다고 했다. 그 연유를 묻자 할머니의 집은 경기 포천에서도 걸어서 30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라고 한다. 다행히 오전에 치료를 받으면 오후 9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는데, 치료를 오후에 받으면 버스가 끊겨 30리 산길을 걸어서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몸의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눈앞의 질환 치료에만 급급해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할머니는 이 산골 마을로 시집와 화전을 일궈 밭농사를 짓고 평생을 광산에서 돌을 나르며 먹고산 이야기, 동두천 시장에서 콩을 팔기 위해 콩 다섯 말을 머리에 이고 30리길을 걸어 다닌 이야기, 도중에 머리가 아파서 잠깐 쉬고 싶어도 콩을 다시 올릴 수가 없어 참고 장에 가면 30분간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던 이야기 등을 해주셨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고운 할머니의 얼굴에 고생스러운 세월이 보였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할머니가 언제나 명랑하고 밝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금껏 할머니를 지탱해준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는 명랑하고 밝게만 살긴 힘든 세상인 것 같다. 자기 몸 하나 돌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게다가 마음까지 상처를 받으면 좌절하기도 쉽다. 그럴수록 용기를 잃지 말고 긍정의 힘을 믿자.

고구마 할머니처럼 꿋꿋하게 견뎌나가면 언젠가 고난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온기가 느껴지는 할머니의 고구마가 그리워진다.

신준식 < 자생한방병원 이사장 jsshin@jase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