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투우(鬪牛)
1950~60년대 걸작영화를 많이 소개했던 KBS 명화극장은 어린시절 추억이었다. 그중 하나가 앤서니 퀸, 멜 퍼러(당시 표기는 멜 화라) 주연의 ‘불멸의 투우사’다. 투우사 퍼러가 부상을 입고도 기어이 투우장에 들어가는 엔딩 신은 비장미가 넘쳤다. 그래선가. 유부남이던 퍼러는 50년대 최고 배우인 오드리 헵번의 첫 남편이 됐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직접 본 투우(鬪牛)는 전혀 딴판이었다. 잔뜩 흥분한 소, 말을 타고 소 등을 찔러 피를 내는 피카도르, 작살을 찌르는 반데리에로, 소의 심장에 칼을 꽂는 투우사(마타도르), 그에 열광하는 군중…. 마타도르(matador)는 살해자를 뜻하고, 영어에선 ‘흑색선전’으로 원용돼 쓰인다.

투우는 스페인어로 ‘corrida de toros’(소의 질주), 줄여서 ‘toros’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bullfight’다. 청도 소싸움과 달리 소와 인간의 대결이다. 소와의 싸움은 신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서사시’, 페르시아의 미트라신, 그리스신화의 미노타우르스 등에 황소 살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실 투우는 원시 사냥본능과 무관치 않다. 이베리아반도와 남프랑스 일대의 동굴마다 유독 힘찬 황소 벽화가 흔하다. 하지만 스페인의 투우는 그 뿌리가 북아프리카 무어인의 풍습에 있다. 정작 모로코 등지에선 투우가 사라졌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멕시코 등에 남아있다.

스페인에서 투우가 대중화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지 않다. 귀족들이 즐기던 것을 18세기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투우 창시자’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로메오가 물레타(붉은 천)를 도입하고 진행형식을 수립했다. 그의 손자 페드로는 황소 5000마리와 대결한 전설의 투우사라고 한다.

투우의 강렬한 인상은 고야, 피카소 등 스페인 화가들은 물론 프랑스 인상파 마네까지 매료시켰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하바네라’ 못지않게 ‘투우사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8분의 6박자의 역동적인 춤곡 ‘파소 도블레(Paso Doble)’도 투우장 행진곡에서 유래했다. 스페인 신문은 투우를 스포츠면이 아니라 문화면에서 다룬다고 한다.

엊그제 스페인 헌법재판소가 카탈루냐주의 투우금지법을 위헌으로 판결해 또 논란이 커지고 있다. 투우를 ‘전통’으로 규정한 스페인 의회의 결정이 우선한다는 이유다. 카탈루냐는 1714년 스페인에 합병됐지만 언어 문화 역사가 달라 분리독립 의지가 강하다. 투우금지법도 그 일환이었다. 스페인인들은 투우가 전통일지 몰라도 이방인에겐 잔혹한 동물학대로 비쳐진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