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의 한 중국집은 조모씨(39)에게 평생 일터였다. 1997년 말 배달일을 시작했다. 주방 보조를 거쳐 몇 년 전부터는 주방장을 맡았다. 하지만 2000년 5월부터 그의 하루 일당은 불과 2만원이었다. 나머지 월급은 양육비 명목으로 보낸다는 중국집 사장 김모씨(58)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장은 그에게 책임져야 할 아내와 자녀가 미국에 있다고 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그는 사장을 엄마처럼 의지했다.

사실 조씨는 아내란 여자를 딱 한 번 본 기억밖에 없다. 2000년 초반 호감 가던 여자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한 번 태운 게 전부였다. 사장은 그가 술을 먹고 사고를 쳤다고 했다. 종종 아내라는 사람이 “곧 만나러 가겠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양육비가 모자란다”는 말에 1억원대 빚까지 내 사장에게 줬다. 경찰 조사 결과 모든 건 중국집 사장의 ‘자작극’이었다. 아내라면서 전화를 건 것도 사장이었다. 조씨가 의구심을 품고 신고하려 하면 자신이 국가정보원 간부 딸이라고 협박했다. 결국 김씨는 16년 동안 2억4000만원 상당의 임금을 착취한 혐의로 구속돼 다음주 법정에 선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는 의학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적인 고용주에 희생된 약자였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갑질은 ‘현대판 노예계약’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로 지적장애인이 표적이 된다. 청주에 사는 지적장애 3급 장애인 김모씨(42)가 대표적인 사례다. 1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자 이웃이던 변모씨(64) 부부는 그를 양자로 거뒀다. 그때부터 김씨는 변씨가 운영하던 시골 마을의 타이어 가게에서 일했다. 타이어 가게 인근의 2평 남짓한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다. 임금은 한푼도 없었다. 변씨 부부는 김씨의 장애인 수당 2430만원도 챙겼다. 변씨는 ‘거짓말 정신봉’ ‘인간 제조기’라는 글자를 써놓은 몽둥이를 만들어 김씨를 상습 구타했다. 경찰은 김씨가 맞고 있는 것을 본 이웃 주민의 신고로 수사를 시작해 10일 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지난 7월엔 19년간 축사에서 학대받은 ‘만득이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동네에서 ‘만득이’로 불리던 지적장애 2급 고모씨(47)는 악취가 진동하는 축사 옆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임금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9월엔 서울 은평구에선 지적장애 3급 피해자를 종업원으로 고용해 5년간 착취한 중국집 사장과 양어머니가 검거됐다. 사장은 하루 17시간씩 일을 시키면서도 최저임금보다 적은 월 100만원을 지급했고, 그마저도 양어머니가 챙겼다.

2014년 전남 신안군에서 터진 ‘염전 노예’ 사건에선 피해자가 92명에 달했다. 염전 주인들은 지적장애인에게 일을 시키며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떼먹었다. 장애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고 유인, 새우잡이 등 어선의 선원으로 고용해 착취하는 일명 ‘선원 노예’ 사건은 해안가 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적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갑질은 타이어 가게, 축사, 염전 등 장소만 다를 뿐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며 “통상적인 갑질을 넘어선 반인륜적 범죄”라고 지적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