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이 정해진 건 아니다. 천하의 슈퍼갑이라도 어느 순간 을로 바뀐다. 하찮기만 했던 을이 어느 날 갑자기 갑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문제는 변신이다. 갑이 을로 변신하는 건 만만치 않다. A변호사는 검사 출신이다. 지검장과 고검장을 두루 거쳤다. 그가 검찰 옷을 벗은 건 2012년. 그의 말을 빌리면 “30여년 검찰 생활 동안 빳빳해진 목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A변호사는 고민했다. 남들은 ‘고검장 출신의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부러워했지만, 그들만의 세계에서 을은 을이었다.

A변호사는 확실한 을로 변신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1) 전화나 문자에 곧바로 응답한다 (2) 약속 이야기가 나오면 곧바로 날짜를 잡는다 (3) 약속 장소에 15분 먼저 가고 상석을 양보한다였다. 검사 시절엔 바빴다. 전화를 제때 못 받은 적도 많았다. 문자에 답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갑이었다.

변호사가 되니 달라졌다. 대부분 전화가 업무와 관련된 거였다. 놓치면 손해였다. 혹 부재중 전화에 연락이라도 안 하면 “아직 ‘검사때’를 덜 뺐군”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래서 전화는 무조건 받고, 문자나 카톡엔 즉시 응답한다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정했다.

검사 시절엔 “한번 밥이나 먹읍시다”는 말을 인사말로 하곤 했다. 그냥 말뿐이었다. 변호사가 된 뒤에 달라졌다.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한번 봅시다”하면, 즉시 날짜를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을 만나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다고 한다. 약속 장소에 일찍 가는 것도 원칙으로 정했다. 대개는 15분 전에 나간다. “명색이 고검장을 지낸 터라 상대방이 굉장히 감격해 한다”고 A변호사는 전했다.

정부 고위관료는 물론 세무서나 경찰서 등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내려놓은 다음엔 ‘갑질’을 하지 못한다. 얼마나 빨리 을로 변신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제2의 삶’이 결정된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