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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차라리 '기초과학 포기'를 선언하라

입력 2016-10-05 17:40:50 | 수정 2016-10-06 01:09:15 | 지면정보 2016-10-06 A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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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자율성 배제한 연구비 배분
나눠먹다 보니 모두가 쥐꼬리 수준
연구자 주도 지원으로 확 바꿔야"

송지준 < KAIST 교수·생명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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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하나로 붙어 흔히 ‘과학기술’이란 단어로 쓰인다. 하지만 과학, 특히 기초과학은 목적성을 가지지 않는 지식의 획득을 의미하며, 기술은 기초과학의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 이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과학이 없다면 기술은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선진국이 이룬 과학적 업적을 바탕으로 기술개발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개발 틀을 유지한다면 선진국에 종속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선도적 연구를 통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을 개발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하는 시점이다.

1990년대 이전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기초과학에 대한 집중 투자 덕분에 지금은 연구인력과 연구시설 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와도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지금이야말로 본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됐다. 하지만 지난 30여년에 걸쳐 어렵사리 이뤄놓은 기초과학의 토대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

기초과학은 대부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으로 지원되고 있다. 최근 10여년간 국내 곳곳에 세계적 수준의 연구환경이 조성됐고 많은 연구자들도 국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국가 R&D 예산 중 기초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뒷걸음질치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는 기초과학의 기본인 창의성과 자율성을 배제한 채, 장기적인 계획과 방향성도 없이 유행에 따라 국가적 아젠다를 급조하고 소위 대형 국책연구에 R&D 예산의 상당부분을 쏟아붓고 있다. 기초과학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는 연구자들은 국가적 아젠다를 앞세워 조금이라도 더 연구비를 늘리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수성을 근거로 한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편법에 근거해 연구비가 배분되고 있다는 뜻이다.

기초과학의 본질은 창의성이고, 창의성의 근본은 자율성이다. 기초연구비는 자율성을 바탕으로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자 주도(bottom-up)’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미국은 국가 R&D 예산 중 기초과학 연구비의 대부분을 연구자 주도 방식으로 배분하는 데 비해 한국은 기초과학 연구비의 절반이 국책과제란 이름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집행되고 있다. 기초과학의 핵심인 창의성과 자율성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경제상황과 연구수준에 맞는 기초연구비의 증액도 절실하다. 정부는 한정된 국가 R&D 기초연구비를 가능한 한 많은 연구자에게 배분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구과제의 80%가 5000만원 수준이어서 실질적인 연구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는 기초연구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형 국책과제에 편중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의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연구자 주도 지원 방식과 과제당 연구비 규모를 늘리고, 대형 국책과제의 규모와 적정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기술로부터 독립을 원한다. 과학은 기술개발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술개발의 원천이 되며 지식제공의 보물창고다. 기초과학은 기술개발을 위한 수단으로부터 독립해,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 획득의 목적이 돼야 한다. 과학은 관료로부터의 독립도 원한다. 자율성이 보장된 창조적 기초연구를 위해 관료의 역할은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에서, 자율성에 기반한 창조적 기초연구가 가능하도록 기반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항상 선진국의 과학적 틀 안에서, 선진국의 손과 발이 되는 기술개발만을 하게 될 것이다. 기초과학 연구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차라리 ‘기초과학 포기’를 선언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송지준 < KAIST 교수·생명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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